연필깎이의 결혼 볼륨배지시즌배지

고유주소 시즌2.5 / Vol.33 브랜드 경험 (2013년 10월 발행)

“연필을 깎아오게.” 서슬 퍼런 장인의 굳은 얼굴에서 터져 나올 수많은 질문과 그래도 혹 모를 열댓 가지 덕담들을 예상한 그였지만 정말이지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터였다. 집 안에 들어설 때부터 한두 방울 맺히던 식은땀이 일거에 식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긴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몸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비장하고도 서늘한 장인의 기운이 그에게로 전해진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1.

 

“연필을 깎아오게.”

서슬 퍼런 장인의 굳은 얼굴에서 터져 나올 수많은 질문과 그래도 혹 모를 열댓 가지 덕담들을 예상한 그였지만 정말이지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한 터였다. 집 안에 들어설 때부터 한두 방울 맺히던 식은땀이 일거에 식는 기분이었다. 긴장이 풀려서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긴장으로 들어서기 위해 몸이 이미 다른 방식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니면 비장하고도 서늘한 장인의 기운이 그에게로 전해진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말 못 들었나? 내 딸과 결혼하려면 연필 열두 자루를 성심성의를 다해 깎아 오게. 그것도 손으로 직접 깎아야 하네. 결혼 승낙 여부는 그다음에 얘기할 걸세.”

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함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옆의 민주를 바라보았다.

어이없기는 매한가지라는 표정이었으나 민주는 빠르게 고개를 젓는 제스처를 놓치지 않았다. 일단 알았다고 대답하라는 신호임이 분명했다. 물론 지금이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잘 알았다.

“네. 잘 알겠습니다. 저… 그런데….”

미래의 장인이 될지도 모를 어르신의 눈가가 살짝 삐쳐 올라갔다.

“언제까지 깎아 오면 되겠습니까?”

대답은 빨랐다.

“스스로 완벽하다고 여길 때까지.”

“아… 네….”

그리고 장인은 서슴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다행인 것은 미래의 아내 될 사람과 장모 될 두 사람만큼은 이 상황의 황당함에 대해 함께 공감해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래? 저 양반이 노망이 났나?”

장모의 거친 입담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엄마, 대체 아빠 왜 저래? 나 시집 안 간다고 구박하던 아빠 맞아?”

방을 박차고 나간 장인의 귀에 들릴 법도 하게 크게 오고 가는 대화였지만 그는 그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연필을 깎아 오라니. 결혼을 허락받고 상견례를 논의하기 위해 온 자리에서 들을 법한 얘기가 전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그는 고등학교, 아니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아니 어쩌면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연필이라는 놈을 만나본 일도 깎아본 일도 없던 터였다. 그런데 이제 장가를 가기 위해 연필을 깎아야 한다. 연필은커녕 과일 하나 제대로 깎아본 일 없는, 손재주라고는 종이배 하나도 접기 버거워할 만큼 덩치와 둔함을 겸비한 그가 이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처럼 자리에 앉아 연필을 깎아야 한다.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그 덩치를 하고 대체 어디에 앉아 연필을 깎는단 말인가.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는 마지 못해 여전히 어이없어 방방 뜨는 두 사람을 달랬다. 진심을 전혀 담을 수 없었으나 이 상황에서 함께 불평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주 불가능한 일도, 그렇다고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일단 연필부터 사야 했다.

‘그런데 대체 연필을 어디서 사야 하지?’

동네 어귀에 있던 문구점은 문을 닫은 지 오래였고, 사무실 비품은 총무실에서 받아 써왔지만 연필 따위를 신청한 적은 없었다.

그때였다. 민주가 그에게 기다란 종이 케이스 하나를 내밀었다.

“아빠가 성훈 씨한테 전하래. 어쩌지? 그냥 해본 말은 아니신가 봐.”

민주의 표정에서는 이미 결혼 여부에 대한 걱정이나 의문 따위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케이스에 인쇄된 낯선 연필 브랜드 로고의 철자만 몇 번이고 곱씹어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2.

 

차를 몰고 한참을 들어간 골목 어귀에서 그는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넥타이를 풀었다.

평일이지만 다행히 외근 시간이 애매하게 맞물려 직퇴를 핑계로 이곳으로 운전대를 돌릴 수 있었다. 그는 일단 어떤 질문을 할지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불쑥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저… 연필을 잘 깎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이없었다. 자신조차 말문이 탁 막히는 질문이었다. 자신보다 두 배는 어이없어할 윤 선생님의 표정이 떠올랐다.

황당한 장인과의 첫 만남이 있었던 후 그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지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미래의 장인이 그저 딸을 주기 싫어 미래의 사위를 곤경에 빠뜨릴 장난치고 ‘연필깎이’는 격에 맞지 않았다. 분명히 그 뒤에 어떤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걸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가 지금 정도의 회사에 지금 정도의 학력으로 지원할 수 있었던 것도 언제나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보이지 않는 안목이 작용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하지만 민주는 한 번도 자신의 아버지가 은연중에 갖고 있었던 사위의 조건에 대해 말해준 바가 없었다. 짐작건대 아는 바도 없을 것이었다. 민주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그저 ‘아빠’일 따름이었다. 한 번도 딸의 선택에 대해 가타부타하지 않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아버지, 그리고 딸바보인 아빠. 그러니 애초에 그쪽에서 답을 찾기를 포기한 것은 일면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이 눈치 빠른 김 대리의 안테나에 그렇게 빨리 잡힐지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애 초기부터 민주를 알아왔고, 따라서 그 날 있었던 방문의 의미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김 대리였다. 털어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

성훈의 얘기를 기어이 듣고 만 김 대리는 회의 중에 나온 의도치 않은 아이템 하나를 잡은 듯한 표정으로 얼굴이 환해졌다. 역시 ‘남의 일’이 가진 힘이란 대단한 것이로군, 하고 성훈은 잠시 짜증이 돋았다.

“재미있군. 재미있어. 미래의 사위가 될 사람의 인격과 능력을 연필 깎기를 통해 알아보려 하다니.”

하지만 그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순간 김 대리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내가 아는 분 중에 말이야. 지금은 유명한 사진가이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분이 계셔.

아마 파버카스텔 회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던 모양이야.”

“파버카스텔?”

“이런, 무식하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필 회사 이름도 모른단 말이야?”

밉지 않은 일상의 핀잔이었지만 오늘은 달갑지 않았다.

“그러는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성훈은 되물었다.

“미술 전공자치고 그 연필 브랜드 한 번 써보지 않은 학생이 있을까? 하기야 너는 민주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그럴 법도 하다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선 말이지.”

그의 음흉한 웃음소리쯤은 대수롭지 않았다.

“그런데, 그 칼럼니스트분은 왜….”

“파버카스텔은 가장 먼저 연필을 만든 회사야. 지금의 육각형 형태의 연필을 만든, 어쩌면 연필의 원형을 만든 회사라고. 그 회사의 대표를 인터뷰한 사람이라면 연필을 제대로 깎는 방법까지는 몰라도 이유 정도는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성훈은 재빨리 김 대리에게서 그 칼럼니스트의 연락처를 수소문해달라고 부탁했다. 지금으로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타당한 해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다른 방법이 없다

는 것도 그의 빠른 결정을 거들었다.

지금 그는 ‘윤 선생님’으로 불리는 칼럼니스트의 외딴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3.

 

“커피?”

“아. 네.”

라고 대답은 하였으나 이미 윤 선생이란 분은 커피를 갈고 있었다. 각종 도구는 차치하고서라도 온 집안에 가득한 원두 냄새가 커피 애호가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의 한쪽을 차지한 진공관 앰프와 오래된 스피커로 이뤄진 고색창연한 오디오 시스템을 접하고 나니 어쩌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고심해서 내뱉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작은 압박이 느껴졌다.

“사연은 들었네.”

윤 선생이 직접 커피를 담은 쟁반을 들고 거실 위 탁자로 나왔다. 그는 엉거주춤 쟁반을 받으며 살짝 헤어진 윤 선생의 소매를 보고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이 정도의 취미에 깐깐함까지 겸비했다면 대화가 자칫 딱딱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기우이기를 바라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성훈이 바라보자 윤 선생이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김 대리가 내 제자였다는 얘기는 안 했던 모양이군.”

어쩐지 약속을 정하기까지의 시간이 빨랐다 싶었던 참이었다.

“자네, 혹시 알고 있나? 연필만 전문적으로 깎아주는 장인이 지금 이 시대에 존재한다

는 사실 말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연필을 쓰는 사람도 드문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연필 깎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니. 하지만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아… 저는….”

“한 자루 깎는데 12달러라던가? 어쩌면 지금쯤은 가격이 많이 올랐을지도 모르겠군. 뉴욕에 사는 데이비스 리스라는 사람인데 원래는 만화가였다지. 고객 중엔 영화감독을 포함해 유명인도 여럿 되는 모양이야. 아, 얼마 전엔 그가 쓴 책도 번역되어 나왔다더군.”

연필깎이 장인이라니. 성훈은 자신의 장인만큼이나 이 윤 선생이란 사람도 어쩐지 현실 속의 인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건 궁금하군. 그래, 자네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어떤 뜻이 있으셨으리라 생각하지만….”

“진심인가?”

윤 선생이 갑자기 정색하고 묻자 성훈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하지만 윤 선생은 답이 필요치 않은 질문을 던진 사람처럼 자세를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공관 앰프 쪽으로 다가가며 말을 이었다.

“사진가라는 직업 자체가 발품을 팔아 돌아다녀야 하는 일이지. 그래서 작업의 편의와 효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잡다한 물건들이 많이 필요해진다네. 물론 내가 그런 물건에 관심이 많은 편이기도 하고.”

어느새 온 집안에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베토벤? 모차르트? 어쨌든 커피 향이 한껏 풍부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들어본 적도 같고, 또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한 애매한 곡이었지만 누구의 어떤 곡인지 물을 만큼의 여유가 성훈에겐 없었다.

“파버카스텔 사를 방문한 적이 있네.”

윤 선생은 앰프에 놓여 있었던 음반을 조심스레 종이 케이스에 넣었다. 마치 소중한 누군가의 어깨를 부축하듯이. 그가 쓴 안경의 검은 테와 콧수염 그리고 검고 동그란 음반이 묘하게 잘 어우러진다는 느낌을 받으며 그는 귀를 기울였다.

“사장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물었지. 지금 이 시대에 왜 하필 연필이냐고 말일세.”

윤 선생은 성훈을 돌아보며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묘한 공감이 그를 조금은 안심하게 했다.

“돌아온 답이 뭐였는 줄 아나? 자신은 연필이 아니라 창조의 도구를 만든다고 하더군. 그리고 똑같은 답을 연필심을 반죽하는 나이 지긋한 노인 직원에게도 들었네.”

그의 말은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 막힘이 없었고, 흥분과 차분이 교차하는 나름의 운율을 가진 듯이 거실 안에 울렸다. 중요한 말을 마친 듯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다시 말을 잇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똑같은 질문을 국내 연필 회사 사장에게 한 적이 있지. 그런데 뭐라고 한 줄 아나?”

오선지에 찍은 쉼표처럼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미 그다음 이어질 말을 준비하고 있는 듯 반짝였다.

“‘한 자루에 천 원도 안 되는 물건을 만드는데 잘 되겠습니까?’라고 되물었어.”

작은 한숨이 뒤를 이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돌아와 성훈의 앞에 앉았다.

“어떻게 하면 연필을 잘 깎을 수 있느냐는 질문은 잘못되었네. 그보다 이렇게 묻고 싶군.”

성훈이 윤 선생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건 어쩌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좋은 연필이란 어떤 연필이냐 하는 거지.”

그는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며 다시 잠시 행복해진 듯했다. 입가에 작은 미소가 비쳤다.

“일본 연필은 버터처럼 부드럽게 써지지. 하지만 독일 제품은 거슬거슬한 느낌이 난다네.

연필회사의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연필의 성질이 원래 그렇다’고 하더군. 흑연의 ‘물성’이 부드러움이 아니라 거슬거슬함이란 거지. 종이를 만났을 때 사각거리는 감촉, 그리고 그 소리까지 담아내야 좋은 연필이라는 뜻이네.”

그는 아쉬운 듯 식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연필도 그렇지만 어떤 물건이건 쓰다 보면 만든 사람의 세심한 의도를 깨닫는 지점이 있지. 그런 지점을 만날 때 비로소 감동이 느껴진다네. 모름지기 명품이란 도구로서의 기본적인 기능에 소리와 감촉이 주는 만족까지 더해져야 하는 법이지. 그게 가능하다면 천원짜리 연필도 명품이 될 수 있네.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만든 사람의 철학과 열정이 입혀지면 단순한 물건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있다는 말일세.”

성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디지털은 그런 감각을 주지 못해.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에게 필요한 게 아날로그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네. 직접 만져보고 써보지 않으면 모르는 세계 말일세. 만약 누군가 디지털 제품을 만드는 사람이라면 그 부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몰라.”

그러던 그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성훈에게 처음으로 답이 필요한 질문을 던진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질문을 빠뜨린 게 있군.”

윤 선생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자네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뭔가?”

 

 

4.

 

짧은 회의실의 적막을 깬 건 역시나 김 대리였다. 그는 성훈의 부재와 이유, 그리고 숨은 장소까지도 정확하게 알아내는 신기에 가까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 두 사람의 움직임을 조금이라도 관심 있게 지켜봤다면, 성훈의 동선이 얼마나 판에 박힌 것인지도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뭐해?”

“그림.”

“그림?”

“재밌어.”

“팔자 늘어졌군.”

하지만 성훈은 느릿느릿한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지금 그림이나 그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그거 알아?”

여전히 성훈의 눈은 무언가를 그리는 노트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 연필, 두 쪽의 무늬가 다르다는 거.”

“대체 무슨 소리야?”

“얼핏 보면 나무젓가락처럼 한 몸통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연필이란 건 두 개의 조각이 연필심을 감싸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지. 마치 커피콩처럼. 그리고 두 조각은 각각 미묘하게 다른 색을 띠고 있어. 원래 다른 부분이었으니까.”

“연필에 구멍을 뚫어 심을 넣은 게 아니야?”

“응. 언젠가 유튜브에서 연필 만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어. 두 개의 나무 자루 사이에 홈이 파이고 거기에 흑연과 아교, 왁스가 배합된 연필심이 들어가는 거지. 그리고 압축의 과정을 거치면 이렇게 한 자루의 연필이 탄생하는 거야.”

“전문가 다 됐군.”

“연필 한 자루는 19센티미터, 육각형을 하고 있는 이유는 책상에서 굴러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지. 파버카스텔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연필 회사이기도 하지만 HB나 2B 같은 규격을 제안해서 공식화했기 때문에 유명하기도 해. 육각 연필도, 삼각 연필도 게

네들이 제안했고.”

“결혼 승낙은 받은 거야?”

“아직.”

“너 하는 얘기를 듣고 보니 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야.”

“글쎄.”

“그 대상이 왜 연필인지는 모르겠다만, 이 정도로 열심을 내는데 설마 반대는 안 하시겠지.”

“그러게.”

김 대리는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하는 성훈이 살짝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훈은 김 대리의 표정 따윈 상관없다는 듯 자신의 말에만 집중했다. 김 대리가 아는 성훈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그때 성훈이 물었다.

“대체 좋은 연필이란 뭘까?”

“뭐?”

“윤 선생님의 질문이야. 네가 소개해주었던.”

성훈은 그제야 연필을 내려놓고 회의실 한쪽 벽면의 어지러운 낙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훈과 김 대리는 국내 노트북 브랜드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한때 적지 않은 명성을 누렸으나 지금은 그저 그런 노트북으로 평가받는 브랜드였다. 대기업과 해외 브랜드들이 일찌감치 자리잡은 시장에 중국 브랜드까지 혼재하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시장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넷북의 열풍이 거품처럼 꺼지고 울트라북 시장 역시 비슷한 상황에 이르자 사람들은 이제 더는 좋은 노트북을 고민하기보다 태블릿과 모바일 등의 대체재로 눈길을 옮겨가고 있었다. 더 얇고 더 빠른 ‘노트북’보다는 좀 더 휴대가 편리하고 사용이 간단한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었다.

“값싸고 잘 나오고 안 부러지고. 그거면 되지 않아?”

“그렇지. 그런데 또 그렇지가 않아.”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거야?”

“있지. 하지만 써봐야 알아.”

“…”

“실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연필과 종이가 점점 더 좋아져. 일이 풀리지 않을 테면 한밤중에 책상 앞에서 연필을 깍지. 물론 장인어른의 말 때문에 마지못해 깎기 시작한 거긴 해.

하지만 손으로 연필을 깎다 보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손끝의 감각이 되살아나는 느낌이 들어. 대부분 연필에선 깎을 때마다 특유의 향이 나. 연필은 향나무로 만들어지거든.

휴대용 연필깎이로 깎다 보면 무지개 같은 연필밥도 생기지. 기계로 된 연필깎이를 돌릴 때면 마지막 느슨하게 풀어지는 느낌이 좋아서 어느샌가 그 순간을 즐기게 돼.”

“나도 아이 방에서 본 적이 있어. 하이샤파였던가?”

“연필심의 종류와 회사에 따라 종이에 그어지는 느낌과 소리도 사뭇 달라. 빵에 바르는 버터처럼 부드러운 연필도 있고 만년필 촉으로 사인하는듯한 쾌감을 주는 연필도 있지.”

“그림은 왜 시작한 거야?”

“아, 그거? 깎기만 하다 보니 지겨워서 말이야.”

어이없어하는 김 대리의 얼굴을 마주 보며 성훈이 웃었다. 김 대리는 늦은 밤 책상 앞에 앉아 열심히 연필을 깎고 있는 성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다행히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성훈은 연필을 두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자신이 스케치한 노트를 들여다보았다.

“노트북을 타이핑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들어.”

“답답하지 않아?”

“물론 답답하지. 손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니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고. 뭐랄까. 늘 차로 가던 출근길을 어느 날 휴가를 내고 천천히 산책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재밌는 건 바로 그런 이유로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풍경이 그제야 하나둘 보인다는 거야. 새로 생긴 카페나 음식점의 간판도 눈에 들어오고, 평소에는 절대 알지 못했던 햇볕 잘 드는 벤치와 그 뒤에 옹기종기 모여 자라는 작은 대나무 숲도 보이지. 그리고 그 뒤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그제야 작은 개천 하나가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 개천이 실은 마을 뒷산

의 약수터로 이어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지.”

“화가가 시인을 만났군.”

“이번 프로젝트,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갑작스러운 제안에 김 대리는 처음엔 무슨 소린가 했다. 그러고 보니 둘은 이러고 있을 처지가 정말로 아니었다.

“무슨 소리야? 당장 이번 주 목요일이 피티라고.”

“확신이 들어?”

“확신에 찬 피티 따윈 해본 적 없어. 확률을 높이는 데만 집중할 뿐이야.”

김 대리의 대답은 차가웠다.

“속도와 무게, 가격은 더는 차별화 요소가 될 수 없어.”

“클라이언트가 그 정도 현실도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

“노트북 역시 기계이기 전에 뭔가를 쓰는 도구야. 내가 아는 어떤 작가는 단종된 타자기를 계속 쓰기 위해 전용 먹지를 산더미처럼 사재기한 사람도 있어.”

“아마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닐걸?”

“어차피 정해진 파이야. 시장의 룰을 그대로 따라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거야.”

“이봐. 노트북은 연필이 아니야.”

“그렇지. 그래서 승산이 있어.”

“무슨 소리야?”

“파버카스텔과 스테들러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바로 250년에 걸친 역사야. 일본 연필이 아무리 정교하고 부드러워도 그들은 ‘연필은 원래 거칠다’고 맞받아치지. 그게 바로 오리지널의 힘이야. 우리 역시 후발 주자고 시장에서 약자야. 다른 걸로 승부해야 해.”

“노트북에 필기감이라도 담자는 거야. 뭐야?”

전에 없이 흥분한 김 대리 앞에서도 성훈은 동요하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스크립트를 읽는 확신에 찬 앵커처럼 고른 호흡으로 대꾸하는 성훈이 김 대리는 조금 낯설게 여겨졌다.

아니 어쩌면 한 번은 본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지금의 회사에 첫 출근하던 그 날, 혹은 민주를 만나고 나서 처음 같이 보았던 그 날, 그런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바라보고 있으면 뭔가를 쓰고 싶어지는 노트북, 키보드의 촉감과 경쾌한 타이핑 소리를 즐길 수 있는 노트북, 사용하는 사람과 같이 호흡하는 노트북을 제안해보자.”

김 대리는 성훈이 자신의 팔뚝을 잡고 가볍게 흔드는 걸 보고 있었다.

“김 대리, 도와줘.”

가볍게 뛰는 맥박 소리. 뜨겁다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해도, 오랜만에 사람의 체온을 느끼

고 있다고 김 대리는 생각했다.

 

 

5.

 

프레젠테이션을 끝낸 성훈과 김 대리는 클라이언트 사의 자판기 앞에서 재킷을 한 손에 걸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넥타이 끈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차가운 캔커피 하나씩을 뽑아들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열정으로 시간과 자료의 부족까지 메울 순 없었다.

하지만 성훈은 김 대리가 끝까지 자신을 믿고 지원해주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감사했다. 좋은 결과가 그 신뢰를 더욱 빛나게 해주겠지만 아니라 해도 여한은 없을 것 같았다. 컨설턴트로서는 경계해야 마땅한 감상적인 생각이라는 생각도 함께 하면서.

그때였다.

“길성훈 씨?”

클라이언트 사의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하는 나 실장이었다. 경쟁 피티의 결과가 이렇게 빠르게 나올 리 없다는 의구심에 성훈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장님이 잠깐 보실 수 있느냐고 하시는데.”

“아… 피티 건이라면 김 대리도 함께….”

“아뇨.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나 실장이 소리 없이 웃는 모습을 성훈은 미처 보지 못했다. 성훈은 나 실장의 뒤를 따라 사장실로 들어갔다.

 

 

6.

 

“앉게.”

성훈은 돌아선 채 책을 꽂고 있는 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보다 넓지 않은 사장실의 전경을 낮은 시선으로 훑었다. 책상 위에는 꽃 한 송이가 투명한 유리병에 꽂혀 있었다. 다른 가구나 책들과는 어째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늘 피티는 훌륭했다고 들었네.”

그제야 사장이 책상을 지나 소파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었다. 성훈은 그 손을 잡으면서 사장의 얼굴을 처음으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저도 모르게 목 깊은 곳에서 한숨 같기도 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네.”

사장이 손을 거두고 먼저 소파에 앉았다. 이삼 초의 간격을 두고 성훈이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어차피 다시 만나야 할 처지들 아닌가? 우리 말일세.”

성훈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몇 번을 상상한 장면이지만 이런 곳에서 장인을 마주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민주 얘기로는 연필을 백 자루는 너끈히 깎았다고 하던데, 사실인가?”

“아… 네….”

“어두워서 잘 보지 못했겠지만 실은 나도 그 피티를 중간에 들어가서 보았네.”

이 사실조차 금시초문이었다. 모든 계약과 조율 과정은 부사장 선에서 매듭지어졌기 때문에 사장을 직접 대면할 일은 아직 없었다.

“내가 굳이 오늘 자네를 보자고 한 건.”

마침 비서가 커피 두 잔을 내어왔다. 사장은 잠시 호흡을 고르고 성훈에게 커피를 권했다. 커피 향을 그렇게 짙게 느낀 건 윤 선생의 집을 찾았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윤 선생이 던진 인상적인 말들이 필름처럼 성훈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사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듣고 싶은 답을 오늘 피티에서 얻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세.”

잠시 침묵이 흘렀다. 책상의 작은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음악이 흘러나왔다. 민주가 좋아하는 쳇 베이커의 트럼펫 연주였다. 어쩌면 저 꽃 역시 민주가 얼마 전 이곳에 들러 꽂아 놓고 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건 그 때문이었다. 민주는 종종 자신의 책상에도 그렇게 꽃을 꽂아놓고 가곤 했다. 그 때문에 성훈은 식도 올리기 전에 이미 회사 여직원들 사이에서 유부남 취급을 받고 있었다.

“내가 자네에게 연필을 깎아 보라고 제안한 건, 어쩌면 나와 내 회사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네. 속도와 규모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이 시대에 연필을 깎는 하찮은 일을 과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할지가 궁금했던 것이지. 그리고 그건 나에게도 해당하는 질문이었다네. 지금껏 해오던 사업과 삶의 방식에 대해 한 번쯤은 의심을 품고 싶었달까.”

사장은 다시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두 손을 잡고 소파에 몸을 크게 묻었다. 성훈 역시 허리를 바로 세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장인의 두 눈을 직시할 용기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답을 오늘 피티가 말해주더군. 물론 피티 자체가 완벽하다는 말은 아닐세.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딴생각을 했지. 막연하던 생각에 물길이 트였달까. 내가 말하는 답은 정답이라기보다는 방향에 관한 것일세. 앞만 보고 질주하던 사람이 옆을 돌아보면 그 게임은 지기 쉽지. 발사대를 떠난 로켓이 추진력을 잃으면 떨어지고 말듯이. 하지만 그렇게 살아본 사람들만이 아는 사실이 있지. 그저 달리는 일에만 몰두하느라 ‘왜’ 달리는지에 대한 질문을 놓쳐버린다는 사실을.”

사장은 몸은 그대로 소파에 묻은 채 고개를 돌려 책상 위의 꽃을 바라보았다. 성훈은 그제야 사장의 주름진 얼굴의 거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다행히 민주가 아빠는 닮지 않았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애써 떨쳐내면서.

“민주가 여덟 살 때쯤이었나.”

다시 사장이 성훈을 마주 보았다.

“어느 날 출근하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민주 엄마가 이렇게 물었지.”

사장은 말을 잇기 전에 잠시 숨을 고르는 듯했다.

“대체 당신이 나에 대해 아는 게 뭐죠, 라고.”

성훈이 용기를 내어 사장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사장은 꼿꼿이 세운 고개는 그대로 둔 채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소중한 무엇을 들키지 않기 위해 딴전을 피우듯.

“그제야 나는 알았지. 내가 아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정말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말일세.”

성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사람이 사람을 안다는 게 뭘까? 그건 참 어려운 질문이지. 하지만 그 사람의 나이와 성별, 입는 옷, 좋아하는 음식의 취향 따위와는 또 다른 그 무엇일세. 굳이 설명을 붙이자면 ‘교감’이랄까. 오늘 피티에서도 자네가 한 말이지만, 교감이란 대상에 대한 지식 그 이상의 무엇이라네. 함께 시간과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지. 좋은 연필은 그걸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영감을 얻게 도와주지. 그러나 그건 그 사람과 연필 사이에 일어나는 교감이라네. 제 삼의 인물은 알 수 없지. 그래서 소중한 것이고. 노트북을 도구로 여기는 사람에겐 메모리와 CPU가 중요하지만, 노트북을 친구로 여기는 사람에겐 함께 하는 시간 그 자체가 중요해진다네. 보고 있으면 만지고 싶고, 만지고 있으면 켜고 싶고, 켜고 있으면 쓰고 싶어지는 것. 이미 개발팀은 키보드의 키감 향상을 위한 TFT를 구성하고 있을 걸세. 자네 조언이 많이 필요하겠지. 노트북의 어느 부위에 조명을 배치하고 제외할 건지도 중요한 개발 이슈가 될 걸세. 필요하다면 본체의 플라스틱을 다른 재질로 대체할지도 모르겠군.”

사장은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했다. 아니 조금은 흥분한 것 같았다. 누구보다도 성훈은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전 김 대리 앞에서 본인이 경험했던 그 흥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참, 내가 민주 엄마의 그 말에 뭐라고 대답한 줄 아나?”

성훈은 다시 몸을 곧추세우고 막 들려던 커피잔에서 손을 뗐다.

“그냥, 안아주었네.”

성훈은 책상 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쳇 베이커의 낮고 깊은 트럼펫 연주 소리가 장인의 목소리와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것이 사람의 목소리이고 어느 것이 연주인지 잘 구별이 가지 않을 만큼.

“그리고 그날은 일찍 퇴근해서 처음으로 함께 와인을 마셨지. 물론 다음 날은 또 여전히 바빠지긴 했지만….”

그리고 잠시 후 성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민주를… 더 잘 알아가겠습니다.”

장인이 손을 내밀었다.

“허락해주신다면.”

성훈은 그 손을 잡았고 장인은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았다.

“부탁하네.”

성훈은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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