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호켄 ┃생명에 이바지하는 생명의 비즈니스
자신의 가치로 변혁하라 볼륨배지시즌배지

고유주소 시즌2.5 / Vol.28 에코시스템 브랜드 (2012년 12월 발행)

“네 말처럼, 우주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탄생은 하나의 주요한 사건, 정말로 주요한 사건이었어. 인간이 탄생하자, 우주의 나머지 부분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했고 전개되던 드라마에서도 밀려났지. 이 드라마에는 지구 혼자로 충분했어. 지구는 인간의 출생지이자 고향이거든. 그게 지구의 의미거든. ‘역할 맡은 자들’은 세계를 인간 생명의 지지 기반, 즉 인간의 생명을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로 간주하지.” 다니엘 퀸, 《고릴라 이스마엘》 中, 이스마엘의 대사

The Interview with 환경운동가 폴 호켄(Paul Hawken)

 

 

“네 말처럼, 우주의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탄생은 하나의 주요한 사건, 정말로 주요한 사건이었어. 인간이 탄생하자, 우주의 나머지 부분은 전혀 흥미를 끌지 못했고 전개되던 드라마에서도 밀려났지. 이 드라마에는 지구 혼자로 충분했어. 지구는 인간의 출생지이자 고향이거든. 그게 지구의 의미거든. ‘역할 맡은 자들’은 세계를 인간 생명의 지지 기반, 즉 인간의 생명을 생산하고 유지하기 위해 고안된 기계로 간주하지.” 다니엘 퀸, 《고릴라 이스마엘》 中, 이스마엘의 대사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부르짖으며 더 이상의 파괴를 멈추자는 이들에게 간혹 어떤 사람들은 *창세기를 들먹이며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인간에게 이 지구상의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신이 부여했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정복’하고 ‘다스리’는 과정에서 자연이 파괴되고 생물들이 멸종되어도 이 모든 것은 오히려 순리적이라고 강변하곤 한다. 이제 곧 우리와 이야기를 나눌 폴 호켄은 그의 저서 《비즈니스 생태학》에서 이런 사람들의 주장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


‘무척 논리적인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은 엉터리다.’


그렇다. 그의 말에 따르면 페름기 말기나 백악기 같은 대규모 멸종 사태를 제외하면, 과거의 멸종 사례들은 생명체들을 위한 새로운 기회의 장을 열어주었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최소 38억 년에서 최대 60억 년까지 추정한다. 수십 억년을 무탈하게 굴러온 생명의 삶터는 고작 몇백만 년 전 출현했다는 한 유기체 때문에 위기에 처해있다. 화산 폭발이나 유성 충돌 같은 자연재해로 인한 멸종이 아닌, 유기체가 유기체를 멸종시키는 형국에 직면했다. 호모 사피엔스, 혹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불리는 이 유기체는 더는 슬기롭거나 지혜로워 보이지 않는다. ‘슬기로운 사람’들이 구축한 가장 거대한 시스템 중 하나인 비즈니스는 경제적으로도, 환경적으로도 거대한 한계에 부딪혔다. 누구도 이 한계가 야기할 사회적 혼란은 원치 않지만, 이미 문제점들은 환경과 사회, 경제를 비롯해 전 방위적으로 대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빚어낸 시스템의 의미를 자연과 공유하고, 그 원리를 자연과 동화시켜야 한다.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우리를 도울 수 없다. 우리가 신을 도와야 한다. 그것이 우리 자신을 궁극적으로 돕는 길이다.’


인간은 명백하게 자연의 일부이지만, 정작 그 활동은 상호 존중이나 순환과 같은 자연의 기본 원리를 상실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환경과 지속가능성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구조의 불합리성 등을 진지하게 고찰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폴 호켄을 만나야 했던 이유다.


‘저기 먼 곳에 환경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환경이다. 환경은 우리의 정신이자 소망이며, 이 환경은 우리가 지금 치유할 방법을 찾고 있는 이 세상을 창조했다.’ 폴 호켄

 

*창세기
환경개발론자들은 가끔 다음의 성경구절로 본인들의 입장을 강변한다.
창세기 1장 28절의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가 그것이다.

 

 

파괴의 비즈니스, 수호의 비즈니스

 폴 호켄. 그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우리나라에서 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답했다. 급진적인 환경주의자라고. 사실 급진적이라기 보다, 그의 태생이 그렇다. 호켄은 당당히 말한다. “I was born an environmentalist.” 이미 열 살 때 시에라 클럽의 데이비드 브라우어(David Brower)를 만나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고, 대학에 진학했을 때 사람들이 본인과 같지 않다는 것에 오히려 충격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호켄이 1993년에 세상에 내놓은 《비즈니스 생태학》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기에) 상당히 도발적이다. 《비즈니스 생태학》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때는 미국 발행 후 무려 10년이 지난 2004년 9월이었다. 1993년 당시 미국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을 때, 호켄은 아무런 평론을 받지 못했는데 이는 출판사와 매체들에 가해진 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 그는 이것을 ‘배척당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호켄은 절제된 뉘앙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얼마나 많이 팔리는 것보다, 단 한 명이라도 내 책을 읽고서 세상에 변화가 일었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고.

 

《비즈니스 생태학》은 20년 전에 읽지 못한 게 후회될 정도로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가치를 높이는 일이 비즈니스의 본질이자 모든 것이 된다면, 그 다음 문제는 우리 자신의 가치를 되찾는 일이다’ 같은 말은 20년 전의 비즈니스를 생각해 보면 더욱 선동적이지 않나. 당신은 환경운동가이자, 이 책을 비롯해 4권의 책을 베스트셀러에 올린 작가이기도 하고, 기업가이기도 하다. 이런 당신의 활동이 세상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의 작업에서 말하고 싶은 바는, 생태학적 그리고 환경적으로 해를 끼치는 시스템은 사회적인 해를 끼치는 시스템과 같다는 점이다. 여기서는 사회적 문제가, 저기서는 환경적 문제가 일어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며 존재해왔다. 지구를 더 깊이 파헤쳤다. 엄청난 석탄을 태워댔고, 어디도 갈 수 없을 만큼 꽉 막힌 도로에서 차를 몰았다. 그래서 지구에 이중창을 끼운 듯 공기가 뜨뜻하게 변해버렸지 않나. 우리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는 운동을 시작한 것은, 우리 중 상당수가 나르시시즘적이고 편리한 생활방식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5세기에 걸친 집단 학살, 그리고 토착민 학대로 얻은 생활방식이다. 현재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에 직면한 거다.

 

이제 이 상황이 너무나 익숙해서 수많은 학자가 지구 자원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무덤덤해질 정도다. 스위스의 마티스 와커나겔(Mathis Wacekrnagel)의 말이 생각나는데, 1960년에 인류는 생태학적 능력의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불과 40여 년 만에 그 능력의 1.2배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구의 생산력보다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한 만큼 우리가 현재와 미래에 치를 대가는 당신이 말한 ‘회복(restoration)’의 필요에 제공하는 듯하다.
자연은 가용 에너지를 종족에게 유용한 쪽으로 유도하는 개체에 호의적이다. 우리의 고속도로, 교외의 마을, 식량 시스템을 말하는 게 아니다. 풍부한 자원의 유산, 1억 년에 걸쳐 생성된 생물 자원이라는 선물, 생활 구조 등이 소멸 되도록 소비하는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자연 세계는 이 지구에 거주 중인 67억 명의 사람보다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자연의 쓰레기는 부패하고, 부식되고, 썩어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구의 토양과 바다를 기름지게 만들어 주는 부식성 생물의 먹이가 된다. *쓰레기(waste)는 살아있는 시스템 또는 산업 시스템이 되는가에 따라 생명의 식량이 될 수도, 죽음의 근원이 될 수도 있다. 상업용 카펫은 사용된 지 8년이 지나면 폐기되지만, PVC는 땅속에 300년간 존재한다.
 
핵 발전소에서 나오는 플루토늄은 2,500세기에 걸쳐 철저하게 경계하고 보호해야 한다. 참고로 우리 문명은 70세기 정도 됐는데 말이다. 우린 이 행성에 막 등장한 초짜(newbie)들인데, 이 초짜들이 만들어낸 쓰레기가 이 정도다. 인간은 전례 없던 방식으로 지구에 낭비를 초래하고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으며, 화학물질과 혼합물들은 워낙 조작되어 있어 따로 분리하기도 어렵다. 이런 새로운 형태의 쓰레기는 쌓여가고, 생명체를 오염시키고, 물길에 독약을 들이붓고, 해양생물을 질식시킨다. *크리스 조던에게 낭비적인 삶은 곤경에 처한 우리 문명의 숨길 수 없는 폭로물이었던 거다.

  

*쓰레기(waste) 
호켄이 말했다. 상업용 카펫은 8년 후 폐기되지만 이후 300년간 카펫의 재질인 PVC는 땅속에 남아있다고. 회사에서 무심코 찢어버린 종이가 분해되려면 2~5개월, 길가에 버린 담배꽁초는 10년, 오늘 당신이 테이크아웃한 커피의 일회용 컵은 20년, 아이의 일회용 기저귀는 무려 100년이 걸린다. 플라스틱류는 5세기는 기본으로 지나야 한다. 

  

*크리스 조던
미국의 사진작가. 대량 소비와 폐기물로 오염된 환경을 고발하는 작업물을 주로 찍어왔다. 본래는 변호사였으나, 2001년부터 사진작가로 전향했다. 2009년부터 현재까지 진행하는 Midway 프로젝트가 대표적인데, 특히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알바트로스의 사체 사진 등은 사람들에게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플라스틱을 먹고 죽은 새들의 사진을 봤다. 우리가 직면하고 해결해야 할 위기는 생태학적 위기가 아니라, 이 위기를 초래한 비즈니스와 경제의 위기이지 않을까? 온 지구를 아우르는 환경의 하위에서 생긴 비즈니스라는 구조의 모순이 결국 생태학적 위기를 촉발했다는 생각이 든다. 방금 당신이 말한 자원의 과다 소비 문제같이 말이다.
지난 수십 년 간 사람들은 환경운동을 해왔다. 이런 운동이 사회 안정성을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된 이유는, 바로 현재 산업구조가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재생 가능하거나 재생 가능하지 않은 자원들로 사회의 대사작용이 이뤄지고 있고, 심지어 이 자원들은 자원 대체품 혹은 대용품의 비율보다 훨씬 초과하여 소비되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은 지난 몇 년간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거의 들어가지도 않았다. 물가는 계속해서 하락했고, 거기엔 상당한 규모의 경제 성장이 있었다. 자원 부족의 예상과는 대조적인 결과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지난 40년간 우리의 경제성장률을 초과한, 부채와 융자금의 증식률이었다. 대체화폐(ersatz money)는 엉터리 성장, 부도덕한 정치, 수입 양극화, 가짜 번영을 창출한다. 우리는 더욱 긴 수정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금융위기는 좀 더 고도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증상이다. 생태계와 인간의 영향을 무시한 위기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경제만을 가질 수 있다. 그 경제는 실제적인 한계와 조화를 이뤄야 한다. 물론 한계는 무시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언제나 대가가 있다. 이코노미(economy, 경제)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오이코노모스(Oikonomo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가계를 한데 모아 관리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우리의 가계를 관리하지 않았다. 금융위기는 그 결과인 셈이다.

지금 우리는 전쟁, 암, 독성 물질, 죽어버린 대양, 사막, 가난, 사회불안 등을 키우고 있다. 오해하지 마라. 우리가 창조한 환상적이고 놀라운 결과물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경제성장은 엔드게임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성장보다 좋은 것(better than growth)에 뜻을 둬야 한다. 성장보다 좋은 것의 의미는 정량적인 성장에서 정성적인 성장으로의 전환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더 나은 질 말이다. 성장보다 좋은 것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보다 좀 더 뛰어나고, 좀 더 진화 되고, 좀 더 섬세하며, 사람들과 이 행성에 친절한 개념이다. 때 지난 경제성장에 집착한다면, 우리가 갈 곳은 후퇴한 지점이다.

 

16세기의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태동한 이래 우리의 사회구조와 경제관념을 지배해왔다. 자본주의의 특성 중 하나가 정량적인 성장 아닌가. 하지만 이걸로 이룬 업적과 효율적인 결과물을 맛봤기 때문에 정성적인 성장으로 전환하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500여 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패러다임 속에서 인류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해법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다. 이 자본주의적인 시스템하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지금의 시스템은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문용어들을 요소 별로 분해하고,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와 단어의 명확한 이해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상업(commerce)은 고대의 개념으로, 시작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교환을 해왔다. 그리고 비즈니스(business)가 나타났다. 비즈니스는 거래다. 사슴 가죽을 주고 칼로 바꾸는 거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치를 상징하는 통화를 창조했다. 비즈니스는 대략 3~4,000년 정도의 그리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다. 기업은 500년 전쯤 등장했다. 기업(corporation)은 신세계(the New World)를 부당하게 점령하고 통치하려는 회사들의 채무 부담을 제한하기 위해 디자인되었다. 이후에 공기업이, 그다음에 초국적 기업(TNC, transnational corporation)이 등장했다.

*허드슨 베이 같은 초기의 기업들이 초국적 기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초국적 공기업의 견지에서 그건 20세기의 현상이다. 즉 우리는 상업과 비즈니스와 기업의 굉장히 다양한 종(species)을 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상업과 비즈니스는 자본주의 등장 전부터 존재했다. 나는 비즈니스의 광팬이지만, 안타깝게도 비즈니스는 자본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무슨 ‘-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정직, 굳은 신뢰, 서비스, 가치, 그리고 안정성이다.

  

 

*허드슨 베이
1670년 5월에 설립된 영국의 칙허 회사이자 국책 회사다. 당시 캐나다 지역의 모피교역을 위해 설립되었으며, 현재 북미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자 소매업체다. 300여 년 전 설립 당시 영국 국왕 찰스 2세는 그의 사촌 컴벌랜드 공작 루퍼트를 초대 총독으로 임명했으며, 회사가 위치한 허드슨 만(bay)으로 흘러가는 모든 하천 유역의 모피 독점 거래권을 허용했다. 현재는 캐나다 백화점 더 베이(The Bay)와 소매점 질러스(Zeller’s)를 운영 중이다. 한편 허드슨 베이는 2006년, 캐나다인이 아닌 미국인 제리 주커에게 매각되었다.

 

 

정직, 굳은 신뢰, 서비스, 가치, 안정성. 하지만 이런 요소가 발현될 공간인 시장(market) 역시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하지만 시장은 인류가 지구 상을 이동하기 시작한 이래 어디에나 있었다. 앞으로도 거래하고, 교환 가능한 장소는 언제나 있을 거다. 시장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활동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에 공짜 시장은 없다. 미국, WTO, 그리고 기업 이윤의 힘에서 나타난 강압적인 시장들이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곳은 국가와 주(state) 정부의 세계이고, 이 세계는 기업에 의해, 그리고 기업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는 머지않아 곧 부자연스러운 시스템이 될테고, 우리를 죽일 것이다. 자본주의는 피드백을, 지성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지역경제를 파괴하고 혁신을 억압하고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다. 모든 종류의 강압성과 폭력을 시민사회에 가하려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이사실을 목도한다. 비즈니스에는 파괴의 영향력이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는 수호자가 되어야만 한다. 이 세계는 반박할 여지 없이 하나의 세상이다. 비즈니스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지구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Tibetan antelope 티베트 영양
티베트 고산지대 서식, 가죽을 위한
불법 포획으로 멸종 위기.

 

 

회복의 비즈니스는 이해에서 시작한다

“플루토늄이든 방사성 폐기물이든, 모두가 그 원리는 인간이 자연에서 추출한 결과로 만들어낸, 이른바 ‘제2의 자연’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2의 자연’은 이제 우리들의 사회와 자연을 잠식하고, 원래부터 있는 ‘제1의 자연’을 대신하여 차츰 인간의 정신을 억압하고 지배하고 있다.” 다카기 진자부로,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 中
 

북태평양과 대서양에는 거대한 쓰레기 섬이 떠다니고 있다. 북태평양의 쓰레기 섬의 면적은 2009년 기준 140만 ㎢(우리나라의 14배 크기다)였다. 대서양의 쓰레기 섬을 형성하는 쓰레기의 80%는 미국 동부 연안에서 배출한 것으로 추측된다. 저 쓰레기 섬들의 쓰레기들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데, 1cm 이하로 잘게 부서져 해양을 부유하기 때문이다. 바다거북과 고래와 기러기는 해파리인 척 반짝이는 비닐을 먹고 자신이 왜 아픈지도 모른 채 죽어간다. 유니타스브랜드는 익히 숙주를 파괴해 성장하고 결국에는 자기도 파멸하는 브랜드를 암에 비유해왔다. 숙주를 지구와 생태계로, 브랜드를 인간으로 대치시켜봐도 썩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이 이 살아있는 세계를 소모하고 낭비하며 책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는 조직적 차원에서 소모와 낭비를 촉진한 비즈니스도 있다.

 

비즈니스는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당신의 말에서 ‘모든 피조물이 죽어있지 말고 살아있어야 하는 이치를 올바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생명을 파괴하기보다는 보호하려 할 것’이라는 명언을 남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떠올랐다. 지구의 운명을 좌우 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비즈니스 구조는 어떤 식으로 구축되어야 할까?
소로우는 생명이 문명에 중대하다는 사실을 똑바로 이해한 거다. 현재의 산업구조는 기본적으로 이화(異化, catabolic)적이다. 살아있는 구조를 파괴한다. 우리가 지속하고, 생태학적, 사회적, 경제적 파괴를 되돌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에 근거한 산업 구조가 필요하다. 첫째, 자원 생산성을 급격히 증가시켜야 한다. 전자, 연료, 섬유, 물, 광물 등으로부터 지금보다 10배 이상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자원 공급 유형은 생체모방적(biomimicric)인 방법으로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 안전하고, 무해하고, 순환 가능하고, 환경훼손을 적게 하는 생산 방법이 필요하다. 셋째, 경제를 시스템으로 생각하고, 제품을 쟁여놓은 물건더미가 아니라 공급 혹은 서비스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할 거의 모든 것이 ‘서비스’의 개념으로 판매 되어야 한다. 초기 생산자들이 계속 제품의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보증해야 한다. 제품의 재사용과 추후 서비스가 가능해야 하고, 제품을 처음 사용하면 사회에 가치가 창출되도록 제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연자본의 창출을 위한 재투자를 해야 한다. 어업, 생태 농장, 삼림 재건, 기후변화 억제 등의 회복으로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탄생할 경제는 미래에 이득이 되는 경제다. 두 가지의 이유에서 그렇다.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고, 이 행성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후자의 충족 없이는 전자도 없다.

 

《비즈니스 생태학》 등에서 당신은 회복의 경제를 말하며 차세대 산업혁명(the Next Industrial Revolution)이 필요하다는 말을 남겼다. 차세대 산업혁명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차세대 산업혁명이 어떤 모습일지는 오직 예감만 있을 뿐이다. 농경시대에서 산업혁명으로 넘어온 것과 같이 지금의 산업시대와는 급진적으로 다른 모습일 것이다. 우리 눈이 휘둥그래질 기술로 현시대를 갑자기 비틀 걸로 예상된다. 이 혁명은 매우 색다른 감각과 사고로 점철된다. 현재 산업 시대는 오직 지배와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우리는 전쟁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동차부터 매일 접하는 모든 화학물질부터 아이들을 교육하고 여성들을 처우하는 방법들까지 대부분 폭력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강제력과 권력에 대한 문제다. 자연은 그런 방식으로 일하지 않는다. 우리 위에 군림하는 기술과 기술적인 패러다임은, 우리를 무폭력의 핵심 정의인 최소 저항의 길로 인도하는 자연과 비슷해질 것이다.
 
세상은 충분히 더 나은 곳으로 변모할 수 있으며, 우리가 가진 진정한 제약이 무엇인지 이해한다면 그때서야 더 나아질 것이다. 생물물리학적 제한들이다. 우리는 자연의 법칙들과 물리학적 법칙 아래 긴밀히 엮여 있다. 우리의 사회와 경제를 이 법칙 아래 더 빨리 정렬할수록 우리는 더욱 행복하고, 더욱 번영할 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다. 누가 진정으로 기쁘고, 진정으로 보호받고, 진정으로 평화롭게 살지, 우리 중 누가 알겠는가. 우리가 있는 곳은 가능한 모든 결과의 최고라기보다, 한 해 한 해 악화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미래의 모든 사람이 모일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비전이 필요하다. 모든 이에게 공정하고, 품위와 안전을 보장하고, 참여한 이들에게 유익하고,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고, 평화를 낳는 비전이다.

 

 

비즈니스에는 파괴의 영향력이 있다. 그래서 비즈니스는 수호자가 되어야만 한다.
비즈니스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않느냐가 지구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다.

 

 

인터페이스의 레이 앤더슨이 사명과 비전을 제공하는 리더인 것 같다. 이제 인터페이스는 환경경영을 논할 때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회복의 기업을 대표하는 기업이 됐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레이 앤더슨은 선지자였고, 리더였다. (편집자 주: 레이 앤더슨은 2011년 8월 세상을 떠났다.) 레이의 비전은 인터페이스를 회복의 기업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인터페이스에서 생산되는 모든 개개의 제품이 기름 한 방울도 필요로 하지 않고, 실제 회복을 창조하는 기업 말이다. 그게 그의 비전이다. 레이가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대로 좋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옳은 비전을 가진 것이다. 하릴없이 노닥거리지는 않았다. 우리는 비즈니스의 가장 높은 수준에서 깨어나 선언할 사람이 필요하다. 레이처럼 “알겠습니다. 이해했습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말이다. 레이는 “나는 도둑입니다. 나는 내 손주들에게 강도 짓을 저질렀습니다”고 말했다. 수십억 달러 규모 회사의 CEO이지만, 진실하게 고백했다.

 

레이 앤더슨처럼 과거에 환경은 고려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했던 걸 고백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는 게 현재의 추세다. 단순하게는 기업에서 사회공헌차원으로 하는 환경운동부터, 환경친화적인 사업방식으로 기업 가치 사슬을 개선하려는 움직임, 이런 기업들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단체들도 생겨나고 있지 않나. 소비과정에서 기업의 이런 활동들이 구매를 결정짓는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기업부터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변화하는 움직임들이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줄 수 있을까?
질문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환경 운동을 하는데 녹색 소비가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환경적 쟁점들의 전반적 인지도와 이해도가 높아짐에 따라, 온갖 회사들과 마케터들이 우리 제품이야말로 ‘그린’이라며 목청을 높이고 있다. 그린 입문자들에게 단어 ‘그린’은 너무나 광범위하고, 그래서 의미가 별로 없을 수 있다. 어떤 사례에서 그린은, 생산제품과 지금의 비즈니스를 재상상한 작은 회사의 심오하고 진정한 헌신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린은 전혀 이렇다 할 효과를 내지 않는 아주 미미한 변화와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 혹은 한편으로 어떤 케이스에서는 환경 문제를 되려 악화시킬 수도 있다.
 
환경 운동이란 생물, 물리, 그리고 인권, 사회정의에 기반을 둔다. *왕가리 마타이가 주장했던 바와 토요타의 렉서스 럭셔리 하이브리드 SUV가 말하는 그린을 결합하는 건 중요치 않다. 정말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먹거리나 옷을 구매할 때 다른 방향의 구매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 우리의 주거공간을 어떻게 짓고 다시 지을 것인지, 우리가 사용할 에너지의 양과 그 원천을 선택할 것인지 등과 관련한 문제다. 산업대사(industrial metabolism)는 사람들의 선택과 공진화(共進化)한다. 독성물질과 석탄 에너지를 줄이고 제거하기 위해서 유기농 농업, 녹색 화학, 재생 에너지, 공정무역, 모하메드 유누스가 ‘소셜 비즈니스’라고 부르는,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회사들을 세우는 의식 있는 기업가들을 지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왕가리 마타이
아프리카에 3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은, 케냐 출신의 여성 환경운동가. 나이로비대학교 수의학 박사이기도 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일부터 시작하자’는 외침으로 그녀가 시작한 그린벨트 운동은 24년간 케냐를 지배했던 독재정권까지 무너뜨렸고, 2003년에는 케냐 환경부, 천연 자원부, 야생 동물부 차관의 자리에 올랐고, 아프리카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닌, 실제로 합리적인 일을 하려고 했던 왕가리 마타이는 환경뿐만 아니라 선한 정치, 인권, 평화, 균형 등의 이슈를 세상에 선사했다. 그리고 2011년 9월,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설립된 회사’라는 말이 미래의 비즈니스와 브랜드가 갈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다. 생물, 물리, 인권 증대, 사회정의를 포괄하는 정신이 현재 우리가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방식이 결합하여 변화를 꾀한다면, 이뤄낼 변화가 현재의 경제 기후(economic climate)에 실제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오늘날의 비즈니스는 정부와의 안락한 관계 사이에서 부패했다. 비즈니스에서 스캔들이 왜 끊이지 않을까? 거대한 비즈니스는 섬기는 일보다 착취하는 일, 주는 일보다 받는 일에 기초한 조직이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회적 우선권이 상실된 사회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수백,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비윤리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전혀 아니다. 습관적으로 행해지고 조직되는 현재의 경제구조로 끝까지 버틸 수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지속가능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일을 해야 하고, 절대 쉽지 않은 일이다. 변화의 필요가 있는 부분 중 하나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구, 우리의 정신이다. 우리에겐 아이들의 미래를 훔칠 권한이 없을뿐더러, 무너진 경제에서 탈출하기 위해 이 훔친 미래를 최고 낙찰가로 팔아 치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타성에 젖어버린 현재의 비즈니스 구조는 지속가능한 변화를 일으키기 어렵다는 게 당신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비즈니스와 기업에서, 우리 자신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고 분석하는 일이다. 기업들은 보통 그들이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른다. 기업들이 착수해야 할 가장 중요한 활동은 그들 자신을 교육하는 거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이곳에 어떻게 왔고, 무엇이 변화를 주동할지 정확히 알아내는 교육이다. 갈색 세상에서 녹색 세상으로, 파괴의 경제에서 회복의 경제로 오는 변혁이고, 이 변혁은 앞으로 일어날 가장 위대한 경제적 기회다. 대부분 기업은 이런 혁신에 말로만 경의를 표하고, 이를 다루는 부서에 일임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여러 문제를 이해하는 과정에 놓인 진정한 문제와 혁신의 선물에서 등을 돌린 행위다.

 

 

 

Argali 아르갈리 양
알타이 산맥, 티베트, 네팔, 몽골 고원지대 서식,
숫양의 뿔을 얻기 위한 밀렵과 남획. 서식지 유실로 위협.

 

 

숭고한 존재, 변혁으로 가는 길

철학자 한스 요나스는 인간 중심적 입장에서 환경 보전을 주장했다. 그는 저서 《책임의 원칙: 기술시대의 생태윤리》에서 하이데거의 실존 존재론을 계승하여 ‘신을 위해 생명을 보전할 책임’이라는 일종의 목적론적 자연신학이론을 제시했다. 기존 세계를 지배하던 유토피아적 희망의 원리가 아닌, 책임의 원리에 근거한 사상이었다. 요나스는 미래의 인류가 지구 상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절망과 숙명론에 강력하게 대항했다.
 

인간의 존속은 여전히 당위적이며, 존속하는 한 인간의 보편적 이념에 대한 의무는 필연적이라고 경고했다. 자유의 진정한 진보는 우리 인간을 위협하는 상황을 성찰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는데, 이는 ‘두려움의 발견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한스 요나스의 철학은 다음의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너희 행위의 귀결이 지구 상에서 진정한 인간의 삶과 지속과 조화롭도록 행위하라. 혹은 너의 행위의 귀결이 미래에도 인간이 존속할 가능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행위하라.”

 

당신의 말처럼 지금 우리가 누구인지 충분히 고민하고 분석하고 사유했다고 하자. 그런데 중요한 건 행동이지 않은가. 이런 사유 끝에 비즈니스를 영위하는 인간들의 인식과 행위가 점차 변화할 텐데, 그때 변화를 유도할 시간이 남아있을까? 인간이 변화를 유도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인류는 멍청하지 않다. 때때로 우리는 느리게 진화한다. 우리가 변화해야 할 때, 그러니까 인간이 되는 때가 오고 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우리의 직업과 선호도와 편견과 관계없이 지구 상에서 함께 사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직면했다. 내가 말하는 함께란,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하나의 삶이 다른 사람의 지식과 선한 의지에 동참하는 걸 뜻한다.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 지혜는 우리에게 내재해 있고,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지구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이 행동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그리고 생명이 행동하는 바는 생명에 이바지하는 조건들을 창조한다. 이것은 분명 모든 정부와 기업, 그리고 우리 경제의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생활에 이바지하는 존재가 되는 건 모든 종교가 우리에게 가르치려 했던 바다. 황금률은, 삶에 기여하는 일이다. 알라의 99가지 이름에는 관리자, 보호자, 제공자, 지지자 등의 이름이 있다. 불교의 6 바라밀인 관용, 윤리, 인내, 밝게 참기, 집중, 지혜는 생명의 체현(體現)이다. 기독교의 산상수훈에는 온유, 자비롭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축복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이런 가르침이 종교적이기도 하지만, 한편 순수하게 생물학적이기도 하다. 다윈의 잘못된 관점에 의거한 구성을 자연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살아있는 세상을 묶어주는 상호주의, 삶 그 자체에 대한 선천적 이타주의다. 달리 말해 이타주의는 우리의 관심에 내재한다.

 

 

비즈니스에서 스캔들이 왜 끊이지 않을까?
거대한 비즈니스는 섬기는 일보다 착취하는 일, 주는 일보다 받는 일에 기초한 조직이다.
윤리와 도덕 그리고 사회적 우선권이 상실된 사회는 살아남을 수 없다.

 

 

당신이 말한 상호주의와 삶 그 자체에 대한 선천적인 이타주의가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를 모색하는 혁신을 정말 이끌어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환경운동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런 운동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촉발하는데 충분할까?
《축복받은 불안》에서는 환경문제, 사회정의, 그리고 인권운동이 한 곳으로 어떻게 수렴하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운동이 될 것이냐를 언급했다. 내가 질문에 대해 질문해도 되겠나? 만약 내가 그렇다고 답하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면 당신 기분이 어떻겠나? 아니면 내가 말하는 것이 우리가 망한다는 얘긴가? 진실은 간단하다. 우리에게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 논쟁은 등식의 암담한 면을 좀 더 쉽게 밝혀줄 뿐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면 오직 데이터, 사실, 트렌드, 정부와 기업 내에 결핍된 리더십만 보면 된다. 그 반대 케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정말 바보 같은 종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우리는 또한 숭고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선물은 오늘날 우리가 서로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 같이 이 상황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막 변혁의 문턱에 와 있다. 그 변혁의 본성은 각각의 사람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결정할 것이다. 살아가기에 이보다 더 좋은 때는 없다.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에는 놀랍고, 가슴이 터질듯한 감동과 탁월함, 그리고 가슴 아픈 일이 모두 동시에 보일 거다. 우리의 삶의 나머지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오로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환경, 각계의 비판과 내부의 자성으로 정신없는 경제와 비즈니스를 생각하면 오히려 상당히 낙천적인 발언으로 들리기도 한다.
나는 낙천주의나 비관주의에 관심 없다. 이 둘은 우리가 현재 상황을 바라보는 방법을 왜곡하기 때문에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든다. 난 지각, 학습, 인식에 관심 있다. 그런 것에서 변혁을 이끄는 혁신과 새로운 연결성이 유래한다. 만약 우리가 실제적인 측면에서 발생한 사건을 관찰한다면, 그건 상당히 마음 아픈 일이다. 그러나 당신이 인간의 발견과 창의성을 갖고 관찰한다면, 그 미래는 매우 흥미진진할 것이다. 사실 전자는 후자가 잘 작동하도록 이용되는 격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에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배워라. 읽어라. 깨우쳐라. 생물학적인 이해도를 높이고, 기후역학 관계를 충분히 공부해봐라. 심각한 문제들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연료효율이 높은 새 차를 타는 것보다 지금 가진 구형 자동차가 낫다. 삼, 콩, 대나무, 유기농 면섬유의 옷을 새로 사는 것보다 지금 가진 오래된 옷이 낫다. 점차 줄여가라. 이해하면서 진실하게. 지속가능한 움직임들이 진정성과 고요함을 요구한다. 실천으로만 알 수 있다. 어디에 주문하고 의뢰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에서 유래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진정성과 고요함. 폴 호켄이 말한 진정성과 고요함에 대해 좀 더 이해해보자. 헬라어에는 ‘프라우스(Praus)’라는 형용사가 있다. 명사형은 ‘프라우테스(Prauthes)’. 이 단어의 뜻은 ‘온유’다. 당신이 갖고 있는 온유의 느낌은 무엇인가? 나약함이나 유약함이었다면, 분명 온유에 대해 잘못 생각한 거다. 고대인들은, 사람이 고열을 앓으며 아프다가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와 평안함을 찾은 상태,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이 불어오다가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상태를 ‘프라우스(Praus)’라고 표현했다. ‘온유’를 뜻하는 라틴어는 ‘미티스(Mitis)’인데, 이는 야생마에게 재갈을 먹여 길들인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순순히 굴복하는 걸 온유로 생각했다면, 이것 역시 오산이다. 그렇다. 온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 안의 숨겨진 본능과 역량을 숨기고 적재적소에 내보일 줄 아는 능력이다. 성질과 그 본성을 길들여 활용하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 온유함을 잃었다. 숨겨진 본능과 역량을 길들이지 못해 성숙이 아닌 성장만을 향해 마구잡이로 달려왔고, 스스로 만든 체제로 서로 잠식해가고 있다. 그 결과물이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 나눴던, 고열과 사막바람으로 앓고 있는 지구, 이화적인 산업구조, 먹고 먹히는 경제 생태계다. 야생마야 인간이 길들인다지만, 인간 자신은 과연 누구에게 길들여져 온유함을 찾을 수 있는가? 인간 자신이다. 우리에게는 호켄이 말한 것처럼 스스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진실된 지속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주려면, 좀 더 우리 자신을 새로이 길들이는(이해하는)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상생하는 일이고, 우리 인간을 넘어 경제와 자연과 환경 모두에 이로운 일이다. 폴 호켄의 말을 들어보자.

 

“내 목표는 변화를 촉발하는 거다. 내 사명은 사람들을 섬기고, 이 터전을 살기 좋게 하고, 모든 형태의 생명이 겪는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다. 나는 책도 쓰고, 강의도 하고, 사업도 하니 사람들은 나를 작가나 연설가나 사업가일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꼬리표들로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 내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나와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게 당신의 정체성을 말해준다는 거다. 당신은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연락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냥 이메일을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 것이다. 당신의 정체성은 곧 당신 삶의 목적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여기서,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자. 대답해보자.

당신은 누구이며, 여기서 당신은 무엇을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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