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고도 예롭게
Book III. Literature 볼륨배지시즌배지

Written by 정민  고유주소 시즌2 / Vol.22(상) 브랜드 인문학 (2011년 11월 발행)

정민 교수는 책으로만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가 쓴 《다산선생의 지식경영법》은 사람들을 다산 정약용에 열광하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책 중에 나는 연암 박지원의 통찰을 다룬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브랜더 필독서로 꼽는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이미 200년 전에 브랜드 지식에 대한 골격을 연암 박지원 선생이 수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면서 더욱 놀란 것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브랜더보다 정민 교수는 브랜더의 핵심 지식을 알고 있었다. 역시 《비슷한 것은 가짜다》의 저자였다. 그는 내가 수십 년 동안 연구하고 수백 명과 논의했던 브랜드 이슈들을 옛글을 통해 하나씩 일깨워 주었다. 정민 교수 (이하 ‘정’) 제가 한시 하나를 들려주겠습니다. 흰둥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 들밭 풀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저물녘에 손자의 부축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정 이 시는 *이달이라는 사람이 쓴 것인데 이 시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이미지를 떠올려 보세요. 권민(이하 '권')누구 무덤에 간 것 같나요? 정 할아버지와 손자니까 아버지의 무덤이군요. 이 시는 이 무덤이 의미하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수준이 달라지는 시예요. 그것을 알지 못하면 이 시는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죽었을까요? 할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아버지가 죽은 것으로 보아, 추측해 보건대 정상적으로 안 죽었겠죠? 옛날에 정상적으로 안 죽으면 뭐가 있을까요? 전염병 아니면 전쟁이겠죠? 권 전쟁 같습니다. 정 할아버지와 아이는 살아 있고, 젊은이가 죽었으니까 전쟁이겠죠. 들밭 무덤가는 사실 무덤 쓰는 데가 아니잖아요. 또 무덤가에 무덤이 늘어섰다고 되어 있어요.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그러니까 전쟁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확실해지죠. 그리고 개가 따라왔다고 했으니 무덤가는 아마도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나 봐요. 이달이라는 시인은 1530년대에서 1610년대에 살던 사람이기에, 아버지가 죽음을 맞이한 전쟁은 임진왜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처럼 시인은 시 속에서 이미지로 모든 것을 말하고 있어요. 이 시는 바로 전쟁의 슬픔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시예요. 전쟁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가를 얘기한 시인 거죠. 그런데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면서 고즈넉하다, 아주 평화로운 광경이라 말합니다. 이것은 시를 읽은 게 아닙니다. 시인이 모든 것을 다 말해 줬는데도 말입니다. 한시를 읽는 방법은 ‘입상진의(,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새롭게 바라보는 법)’거든요. ‘상’의 한자어는 이미지 ‘상’이며, ‘진의’는 ‘뜻을 다한다’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의 뜻은 ‘이미지를 내세워서 자기가 할 말을 한다’는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미지’라는 것을 앞장세워서 그 이미지들이 대신 말하게 한다는 거죠. 예를 들어서, ‘춥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을 때,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손을 비비는 행동을 취하면 그것은 ‘춥다’는 하나의 메시지가 되는 거잖아요. 즉 이미지가 메시지가 되는 거죠. 시는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절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시는 절대로 외롭다고 말하지 않아요. 시를 보는 독자를 외롭게 만들죠. 이것이 바로 입상진의예요. 이달은 동네 강아지, 풀밭 가에 난 무덤, 할아버지와 손자라는 이미지로 모든 말을 했어요. 그런데 독자들이 이것을 ‘어떻게’ 읽어 내느냐, 그것은 독자의 역량에 따라 다른 거죠.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장도 입상진의로 말을 하죠. 이미지로 모든 것을 다 말하고 있어요. 사람들의 옷차림, 아침마다 문을 열고 닫는 가게 주인의 얼굴들… 이제부터 관건은 CEO죠. CEO들이 이 이미지들을 읽어 낼 수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 말입니다. 분명, 이달의 시를 오독해서 평화스러운 광경으로 읽는 CEO가 있을 거예요. 한시를 읽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와 같습니다. 브랜드에 파워가 있으려면 CEO가 시장 속에서 숨은 그림들을 얼마나 잘 찾느냐, 안 찾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시장은 모든 걸 다 말했다는 거예요. 이미지로 말입니다.

연암, 비슷하면 가짜다
Q
“색깔 속에는 스펙트럼이 빚어내는 다양한 광채가 있다. 하나의 꼴 속에는 수없이 많은 태가 깃들어 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라는 책에서 ‘색(色), 광(光), 형(形), 태(態)’가 나오는 이 대목을 읽다가 30분 동안 진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개념에서 브랜드에서 얘기하는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경영, 브랜드 철학 등 핫 이슈가 되는 테마들의 원리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색보다는 광을, 형보다는 태를 보라는 말에서 광과 태는 저에게 ‘*아우라’로 읽혀졌어요.

 

A
 아우라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연암은 이렇게 말했어요. “색중지광(色中之光), 즉 색깔 속에 담긴 빛깔을 보며, 형중지태(形中之態), 겉모습 속에 담긴 태깔을 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눈은 똑같아도 보는 모습은 다 다르지요. 예를 들어 ‘검은색’이라고 할 때 사실 검은색에는 흑(黑), 암(闇), 현(玄), 칠(漆) 등 아주 많은 층위가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색’만 보고 그 안에 있는 다양한 ‘광’, 그 빛깔은 보지 못해요. 그뿐인가요? ‘내 얼굴’이라고 했을 때, 어떤 때는 웃는 얼굴, 또 어떤 때는 성을 내는 얼굴 등 다양한 모습이 있지요. 얼굴이라는 ‘형태’에는 수많은 ‘태’가 있단 말입니다. 이처럼 색 속에는 수많은 광이 있고, 형 속에는 수많은 태가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검은색’ 혹은 ‘내 얼굴’이라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다는 거예요.
 
더 충격적인 것은 그것을 ‘다’ 본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심하게는 그렇게 본 것만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연암은 이렇게 말했지요. ‘*속인은 색과 형만을 보고 판단하고,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는다’고 말이에요. 달사는 남들과 똑같이 보지 않아요. 그 속에 있는 다양한 광과 태를 보지요.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광과 태를 본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껍데기가 아니라 그 속에 숨어 있는 아우라를 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가치’는 거기에 들어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가치는 숨어 있는데, 사람들은 자꾸 그 껍데기만 보면서 거기서 뭔가를 찾으려고 하니 답답한 겁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문제는 늘 색이나 형만 보고 판단하는 데서 생기는 겁니다.

 

Q
이 세상에 달사는 대체 몇 명이나 될까요? 연암 선생은 달사를 이렇게 말하더군요. “그는 자신의 이목만을 가지고 사물을 판단하지 않는다.” 반면 속사는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그는 자기가 아는 세계를 통해서만 창밖의 세계를 이해하려 든다.” 결국, 색과 형을 보는 사람은 자기가 경험한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며, 광과 태를 보는 사람은 경험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A
광과 태를 보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달사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 또한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지 않습니까. 이것은 연암이 얘기한 또 하나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어요. 《비슷한 것은 가짜다》의 첫 번째 얘기이기도 한데요. ‘상기(象記)’, 즉 ‘코끼리’ 이야기예요. 연암은 “세상에 그런 진리는 없어. 변치 않는 도는 없어. 코끼리는 예외가 아니야. 그런 예외는 수도 없이 많아. 코끼리를 가지고 하나의 원리를 설명하려 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연암은 중국에서 코끼리라는 동물을 처음으로 보게 됩니다. 난생처음으로 본 코끼리는 그에게 충격, 그 자체였지요. 그는 코끼리를 이렇게 묘사해요.
 
“괴상하고 진기하고 거대하고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그 무엇… 걸어가는데도 마치 비바람이 지나가는 듯하다.” 그리고는 코끼리를 묘사합니다. “그 생김새가 몸뚱이는 소인데 꼬리는 나귀 같고, 낙타 무릎에다 범의 발굽을 하고 있다. 털은 짧고 회색으로, 모습은 어질게 생겼고, 소리는 구슬프다.”
 
그러면서 연암은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코끼리 하나를 설명하기에도 부족한 자신의 지식을 보게 되지요. 코끼리를 설명하는 데 그저 자기가 알고 있는 동물들을 나열하는 것 외에는 코끼리를 설명할 방법이 없음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찮은 지식으로 세상의 온갖 진리를 꿰뚫어볼 수 없음을 얘기하며,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고정불변하는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이 말은 인간은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존재는 아님을 얘기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획일화된 척도를 만들어 어떤 것이든 설명하려 한다는 것을 꼬집는 것입니다. 즉,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해 비판을 하며 거부하는 것이죠. 연암은 사람들은 지식과 경험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의 원리를 만들고는 그 안에 모든 것을 가두고 있음을 코끼리를 내세워 말한 겁니다. 하나의 원리로만 모든 것을 보려는 사람들이 바로, 색과 형만을 보고 다 보았다고 생각하는 속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움베르트 에코가 쓴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코끼리 대신 ‘*낙타’가 그 자리에 등장합니다. 에코는 소설 속에서 낙타를 등장시키며 하나의 원리로는 낙타를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연암이 에코보다 약 150~200년이나 먼저 산 사람인데, 에코가 만약 연암이 쓴 이 ‘상기’를 보았다면 어땠을까요? 어쨌든, 몇천 리 더 떨어진 동양과 서양에 사는 두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속인은 색과 형만을 보고 판단하고,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는다.

 

 

Q
책에서도 언급하셨지만, 색만 보고 광은 외면하고, 형만 볼 뿐 태는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 같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가치를 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색과 형만 보다 보니까, 연암 선생이 말씀하신 것처럼 ‘비슷해져서 가짜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혹시, 색에서 광을, 형에서 태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A
매뉴얼은 없습니다. 특별한 방법은 없다는 겁니다. 정말 시쳇말로 죽어라 많이 해보고, 미쳐야지만 보이는 겁니다. 제 말이 너무 무책임하게 들리지요? 그런데 그렇게 밖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게요. *성연과 유백아의 이야기 아시지요? 춘추전국시대에 유명한 거문고 연주자였던 성연이 유백아에게 거문고를 가르쳤죠. 성연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술을 다 가르쳐 주자, 어느 날 유백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의 연주를 들으면 그 마음이 느껴지는데, 나의 연주는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성연은 유백아에게 이렇게 말해요. “그건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내 스승 방자춘이라는 분이 동해에 계시는데 나를 따라오너라.” 유백아를 데리고 동해로 간 성연은 그에게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배를 타고 나와 버립니다. 며칠이 지나도 성연도, 성연의 스승이라는 방자춘도 오지 않아요. 유백아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는 슬픈 마음을 움켜쥐며 넋을 잃고 바다를 바라봅니다. 이때 파도가 밀려왔다가 쓸려 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층층이 밀려오는 파도의 장단에 맞춰 외롭고 슬픈 자신의 마음을 실어 거문고를 타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계기로 유백아는 그토록 원하던 마음을 실어 연주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마음으로 연주하는 법을 깨닫게 하려는 성연의 계획이 제대로 먹힌 거지요. 결국 유백아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담은 수많은 곡을 남기며 거문고의 달인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은, 누구나 거문고를 들고 동해에 가서 파도를 본다고 거문고의 달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유백아는 손가락 터지도록 연습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대연주가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백아가 아닙니다. 죽을 각오로 노력하지도 않은 채, 매뉴얼로만 쉽게 얻으려 하죠. 그러니 언제나 색만 보이고, 형에만 얽매이는 거예요.

 

*이달
조선 중기 선조 때의 시인.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달은 문장과 시에 능하고 학문에 조예가 깊었지만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그는 당쟁, 임진왜란 등의 시대적 상황과 신분차별에서 오는 불만까지 겹쳐 젊은 시절에는 주로 방랑과 이별 등의 주제를 다루며 인간 감정의 자연스러운 묘사를 중시하는 당풍을 따르지만 추후에는 자신의 처지와 서민들의 누추한 삶을 시적으로 승화시키는 작품 활동을 했다. 그의 시는 가슴속에 간직한 상처를 따뜻한 느낌의 시어로써 표현했는데, 허균은 그의 시를 “맑고도 새로웠고, 아담하고도 고왔다”고 평가했다.

 

*아우라
지금은 흔히 사용하는 단어가 된 ‘아우라’는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기운 또는 영기 같은 것들을 뜻한다. 독일의 평론가인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논문에서 ‘어떤 예술 작품이나 물건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혼,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기운’이라고 아우라를 설명했다.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는 하나의 예술 개념으로서 ‘창조성이 느껴지는 유일무이성’, 즉 다른 것과는 다른 예술 작품의 원본이 지니는 고유한 특성 혹은 미적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는 산업 사회 이후 영화를 필두로 한 무한 복제 매체의 등장으로 예술이 기계를 통해 복제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진품의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지적했는데, 이를 ‘아우라의 붕괴’라고 정의했다.

 

*속인은 색과 형만을 보고 판단하고, 달사는 그 속에 깃든 광과 태를 읽는다
속인(俗人)과 달사(達士)는 박지원이 《능양시집서》에서 한 말로, ‘통달한 사람은 괴이한 것이 없지만 속된 사람은 의심스런 바가 많다’고 하였다. ‘달사’는 통달한 선비라는 뜻으로, 관물을 보지 않고도 보고, ‘속인’은 직접 눈으로 본 관물만을 전부로 아는 데 머문다. 정민 교수는 저서 《한시미학산책》에서 달사과 속인을 가르는 경계는 ‘깨달음’이며, 이것 없이는 ‘눈뜬 장님’이지만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은 순식간에 변해 버린다고 하였다.

 

*결정론적 세계관
‘결정론적 세계관’이란 지금부터 일어날 모든 현상은 현재까지 일어난 과거의 일들이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17, 18세기 천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근대 물리학은 ‘우주의 모든 물체는 그 방향이 정해져 있고, 그것을 관측하는 인류는 우주의 운행되는 질서를 완전히 알 수 있을 것이다’는 생각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에는 불확정성의 이론이 없었기 때문에 특정 물리법칙에 의해 특정 결과가 나온다고 보는 관점이 대세였다. 이런 결정론적 세계관은 18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시대를 풍미했지만 현대에 이르러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 등에 자리를 내주면서 세계는 불확정적이며 상호작용에 열린 가능성을 포함하는 태도로 바뀌게 된다.

 

*낙타
《장미의 이름》은 1980년에 발표된 이탈리아 기호학자이자 철학자인 움베르트 에코의 첫 장편소설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주의 철학 뿐만 아니라 현대의 기호학 이론이 무르녹아 있는 현대적 고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장미의 이름》에서는 에코의 현대 기호학적 인식태도를 보여주는 낙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왜 짐승에게 뿔이 있겠느냐? 뿔이 있는 짐승에게는 윗니가 없다. (중략) 그런데 윗니도 없고 뿔도 없는 짐승도 있으니 낙타가 바로 이런 짐승이다. (중략) 윗니가 없으면 위가 네 개 있고 뿔이 있어야 마땅한데, 위가 네 개인 것은 분명하지만 뿔은 없다. 따라서 이것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야 한다. (중략)’ 정민 교수는 연암의 코끼리 이야기와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낙타 이야기를 비교하면서 현대 기호학의 인식론과 흡사한 연암의 사유를 비교한다. 연암의 코끼리와 에코의 낙타 이야기는 세상에 고정불변의 이치는 존재하지 않고, 사물들은 살아있다는 같은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한 가지 사물 안에도 온갖 이치가 깃들어 있음을 말하며 획일화된 가치 척도로 세계를 규정코자 하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대한 거부의 뜻을 담아낸다.

 

*성연과 유백아의 이야기
백아가 성연에게서 거문고를 배운 이야기는 《수선조》란 시의 서문에서 전해진다. 마음으로 깨달아 가슴으로 느끼는 이른바 심수상응을 표현한 이 이야기는, 스승 성연이 그의 제자 백아에게 말로는 도저히 전해 줄 수 없었던 심수상응을 최후의 심법인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스스로 터득하게 해준 이야기이다. 백아는 추후 그의 음악을 알아주던 친구 종자기가 죽은 후 거문고 줄을 끊고 평생 다시는 연주를 하지 않았다는 ‘백아절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다산, 과거는 오래된 미래
 Q
교수님의 관심은 18세기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연암 박지원도 18세기를 살던 학자 중의 한 명인데요. 수많은 과거 중에서 교수님의 관심이 유독 18세기에 머문 이유가 궁금합니다.

 

A
18세기는 사실, 조선뿐만 아니라 세계사적으로도 아주 특별한 시기 중 하나입니다. 유럽의 경우, 18세기에 봉건주의 사상이 타파되면서 시민계급이 나타나죠. 이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시작입니다. 이때 *계몽주의 학자들은 지배계층들만이 읽던 저서들을 쉽게 풀어서 시민들이 읽을 수 있게끔 제공하죠. 이때 나타나기 시작한 저서들이 이른바 백과전서식의 책들이에요. 그래서 계몽주의 학자들을 ‘*백과전서파(百科全書派)’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이렇게 시민의식을 깨우는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시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근대의 조짐은 조선에서도 시작되었어요. 조선은 당시 상업이 발달하면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됩니다. 그러면서 중인이라 불리던 상인들이 그야말로 떼돈을 벌게 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때까지 조선을 유지하고 있던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체제가 무너졌음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상황은 연암이 쓴 《허생전》이라는 소설을 보면 아주 잘 나와 있지요. 가난한 양반이던 허생이 더 이상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한양에서 가장 부자라고 하는 변씨에게 가서 만 냥을 꾸지 않습니까. 양반이 상인에게 가서 돈을 꾸는 것도 놀라운데 그 돈을 가지고 허생은 장사까지 합니다. 파격적인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지식의 변화였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이라는 경학이 그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죠. 이러한 지식은 양반이라는 특정 계급에게만 독점적으로 제공되고 있었고요. 그런데 상인들을 통해 중국에서 엄청난 서적들이 유입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지식의 독점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리지요. 이제 지식은 특별한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거예요. 이처럼 18세기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 시대였어요. 정보가 차고도 넘쳤죠. 이 18세기에서 무엇이 보이십니까? 이것이 바로 제가 18세기를 주목하게 된 이유입니다. 18세기는 흡사,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21세기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현재 전 세계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온갖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사회를 ‘*정보화 시대’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18세기와 21세기가 비슷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18세기를 잘 관찰하고 분석하면, 오늘날을 어떻게 읽고 해석하며, 더 나아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이것이죠. 18세기의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대를 살았을까, 말입니다. 이때 각광 받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면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수많은 정보와 지식들을 편집하고 배열하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중의 하이라이트가 다산 정약용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언어로 ‘지식 컨설턴트’였으니까요.

 

 

제가 18세기를 주목하게 된 이유입니다.
18세기는 흡사, 인터넷 혁명으로 인해
정보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21세기와 너무나 똑같습니다.

 

 

Q
다산 정약용은 소위 붐을 일으킬 정도로 오늘날의 사람들도 주목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교수님도 책에서 여러 번 언급하시긴 했지만 다산 선생은 지식 컨설턴트라고 칭할 정도로 무척이나 지혜로웠던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다면, 다산 정약용에게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A
재미있는 예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18세기 당시, 집 비둘기를 사육하는 게 유행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여기저기 집비둘기 사육 방식에 관한 정보들이 넘쳐났죠. 그런데 정작 정보는 많은데 정리되어 있는 책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때 규장각의 검서관이던 유득공이 집비둘기 사육법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 《발합경(??經)》이라는 책을 냅니다. ‘발합(??) ’은 집비둘기를 뜻하는 한자어인데요, 이 책이 나오자마자 시장은 열광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18세기 조선에서도 유럽처럼 *백과전서식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어요. 중국을 통해 엄청난 책들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정작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혹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분류해 주는 작업이 없어서 어떤 정보를 받아들이고 또 버려야 하는지가 관건이던 때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책이었어요.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이 했던 작업은 수많은 정보들에서 알맹이와 쭉정이를 골라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이라는 책에서도 언급했지만, 18세기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벽(癖)’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 분야의 정보를 파헤치며 그것을 기록하고, 정리하는 학자들과 그들이 쓴 책들이 엄청나게 많이 등장한 시기였어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사서삼경과 같이 성인들의 이야기에만 붙일 수 있었던 ‘경(經)’이라는 단어가 비둘기와 같은 어찌 보면 하찮아 보이는 정보들을 묶은 책에도 붙여졌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것을 쓴 저자들이 소위 정부기관인 규장각에서 일하던 학자들이라는 거지요. 이것이 말하는 것은 바로 정보를 대하는 가치관이 달라졌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어요. 이른바 *코페르니쿠스적인 지적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산이 더욱 주목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밝혀집니다.
 
정보들이 넘쳐 나던 때에 다산은 각각의 정보들을 보면서 ‘코어밸류(core value)’의 중요성을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흩어져 있던 정보들을 모으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코어밸류’를 중심으로 정보를 나누고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어요. 심지어 그는 그가 스스로 존경한다고 말한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이나 이익이 쓴 《성호사설》을 보며 코어밸류가 없다고 화를 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는 정보의 재배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던 학자였습니다.
 
그래서 다산이 늘 했던 질문은 ‘왜 우리가 이 작업을 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 다산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이죠. 오늘날 정보는 18세기보다도 더 넘쳐나죠. 그러나 그 정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사람은 몇 안 된다는 겁니다. 21세기에 필요한 인재는 다산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師其意 不師其辭
  사서삼경에 담겨있는 성인의 정신이나, 인간과 인간과의 
   바람직한 관계, 삶을 사랑하는 태도와 같은 정신을 본 받되,
      그것을 표현할 때는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라

 

 

Q
‘오래된 미래’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실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라”는 경구도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수님이 현재 연구하시는 18세기의 지식을 현재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까, 라는 실제적인 궁금증이 생깁니다. 급변하는 디지털 사회에서 과거의 지식이 현재, 더 나아가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까요?

 

A
최첨단의 과학이 발달한 현대 사회를 고루해 보이는 과거의 역사와 비교한다는 것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봐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원리’입니다. 시대가 급변하는 것 같아도 우리 삶의 원리는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지금 고3 학생들은 대학 입시 때문에 힘들어하고, 대학을 졸업해서는 직장을 찾느라 힘들어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는 안 잘리려고 노력하고… 그렇게 살지요. 그럼 조선시대를 생각해 볼까요? 조선시대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과거 급제 준비에 힘들어하고, 과거 급제하고 나면 승진하려고 노력하고, 승진을 하면 그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지금과 너무 똑같지 않습니까? 왜일까요?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 사이클이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이클이 달라지지 않는 한 삶의 본질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동서양의 차이도, 또 고금의 차이도 없어요.
 
당나라 때 문장가로 활동한 한유의 얘기를 들려 드릴게요. 한유는 늘 제자들에게 옛글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어요. 하루는 그의 제자인 유정부가 그에게 와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선생님, 옛글이라는 게 제가 보니까 다 다릅니다. 옛 성현이 지은 글이 다 남아 있지만 그 말은 모두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자꾸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다 다른 옛것에서 뭘 본받으라는 건가요?” 그러자 한유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언제 스타일을 본 받으라고 했니? 그 안에 담긴 정신을 본받으라고 했지!” 여기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바로, ‘사기의 불사기사(師其意 不師其辭)’입니다. ‘사기의(師其意)’, 의미(意) 즉 뜻을 본받고, ‘불사기사(不師其辭))’, 문체 즉 말이나 형식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서삼경에 담겨 있는 성인의 정신이나, 인간과 인간의 바람직한 관계, 삶을 사랑하는 태도와 같은 정신은 본 받되, 그것을 표현할 때는 UB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라는 말인 거지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들만 변할 뿐입니다. 18세기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삶의 원리입니다. 그곳에서 변하지 않는 정신과 가치를 찾아서 그것을 현재에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CEO들이 고전에서 배워야 할 30가지 방법’이라고 해서 원리가 아닌 방법에만 몰두합니다. UB모방에도 차원이 있어요. *‘모동심이(貌同心異)’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心同貌異)’의 모방이 있죠. 겉모습만 비슷하고 알맹이는 딴판인 것은 ‘모동심이’인데 이것은 그야말로 하급의 모방이에요. 반대로 겉보기엔 전혀 다른데 알맹이가 같은 것은 ‘심동모이’입니다. 과거에서 스킬을 배우는 것은 모동심이지만, 정신을 배우는 것은 심동모이죠.
 
흔히 ‘트렌드’라는 말을 하지요. 트렌드라는 것은 겉에서 보기에는 그 시대에 일어난 것 같아 보이죠. 그러나 그 저변에 흐르는 원리를 보면 다릅니다. 그것이야말로 UB오래된 미래예요. 과거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 원리를 심동모이해야 하는 겁니다.

 

*계몽주의 학자들
계몽주의란 인간을 미신이나 권위로부터 해방하여 인간 이성의 자율성을 수립하려는 경향, 또는 운동으로 이성의 힘으로 현존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는 데 목적을 둔 시대적 사조 중 하나다. 18세기는 엄밀한 의미에서 계몽주의 시대라고 불리는데, 역사적으로는 영국의 명예혁명(1688)에서부터 프랑스혁명(1789)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계몽주의 사조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다가 후에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계몽주의자들은 일반인들이 접할 수 없던 대저작들을 읽고 그것을 대중들이 알기 쉽게 내용을 풀어 설명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또한 사회악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하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여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과전서파
18세기 프랑스 계몽사상의 기념비라 할 수 있는 《백과전서 또는 과학·예술·직업의 합리적 사전》의 기고, 편집, 간행에 협력한 진보적 사상가들을 총칭하는 지식인 그룹을 말한다. 《백과전서》 편찬의 기본 취지는 ‘혁명’보다는 오히려 ‘개혁’을 위한 것이었으나, 근대적인 지식과 사고 방법으로 당시 사람들을 계몽하고 권위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이 백과전서파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출신 계층은 부르주아부터 소시민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여러 사상가들이 집필한 《백과전서》는 전체로서의 사상적 통일은 결여되어 있으나 계몽사상의 발전, 특히 프랑스혁명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

 

*사농공상
사농공상은 고려·조선시대의 직업에 따른 사회계급 또는 신분제도 중 하나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종사하는 직업에 따라 신분을 나누기도 하였는데, 사는 선비, 농은 농민, 공은 장인, 상은 상인을 의미하며 그 순서가 귀천의 순서였다. 이러한 신분차별은 수백 년 동안 계속되다가 1894년의 갑오개혁 이후 점차 그 질서가 무너졌다. 연암 박지원의 한문 단편소설인 《허생전》은 이러한 ‘사농공상’ 체제가 무너진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잘 반영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조선 후기 사회가 안고 있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등의 문제점을 ‘허생’이라는 선구적 안목을 지닌 지식인을 통해 비판하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정보화 시대
정보화 시대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이나 휴대전화의 보급에 따라 그 말과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정보화 시대라고 판단하는 기준이 통일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다른 부문에 비해 정보 관련 산업이나 관련 기술이 눈에 띄게 성장하는 사회 또는 정보기술이 정치·문화·교육·일상 생활 등 여러 방면에 침투하여 큰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로 판단한다. 정민 교수는 18세기를 기존의 제한된 정보가 독점적으로 유지되던 시기에서 중국에서 백과전서류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와 정보의 독점적 권위를 무너뜨리고,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범람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현재의 ‘정보화 시대’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백과전서식의 책
18세기는 정보량의 폭발적인 증가로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되는 시기였으며, 무언가에 미친다는 뜻의 ‘벽 ’은 이 시대 지식인들을 특정 짓는 중요한 코드라고 정민 교수는 말한다. 집비둘기 사육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발합경 》뿐만 아니라 담배에 관한 정보를 모은 《연경 》을 예로 든다. 두 작품 모두 이 당시 지식인들의 중요한 특징인 수집벽과 정리벽을 잘 보여 주는 결과물이다.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일상의 모든 것을 주제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당시 학술계 내부에서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로서 주목해야 할 저서들로 평가 받는다.

 

*코페르니쿠스적 지적 전환
이것은 코페르니쿠스가 움직이지 않는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별이 돌고 있다는 천동설에 대하여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주장해 천문학에 대전환을 일으킨 것을 비유한 말이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발상의 대전환, 즉 사고나 견해가 종래와는 달리 크게 변하는 상황을 일컫는 말이다.

 

UB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라
결국 브랜딩은 얼마나 (전략과 전술을 통해) 효과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그 표현한 것을 고객으로 하여금 얼마나 크게 공감(공감은 곧 구매로 이어진다) 받는가에 의해 그 성과가 판가름 난다. 정민 교수의 “자신의 목소리를 담으라”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또한 그것이 그가 말한 변치 않는 원리다. 삶의 성공과 브랜딩의 성공의 공통분모로 꼽히는 그 원리다.

 

UB모방
‘벤치마킹’이란 단어만큼 마케터 스스로 ‘베끼기’에 대해 면죄부를 주면서 자위할 수 있는 단어가 없다. 게다가 선례가 된 성공 사례의 모사만큼 최종 의사결정자를 안심시킬 수 있는 것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많은 수의 마케터가 ‘모동심이’의 단순 모방으로 일을 그르친다. 진정한 의미의 벤치마킹을 위해서는 성공 사례에 대한 다면적 접근과 심원의 이해가 필요하다. 한 브랜드의 성공요인은 그들이 사용한 전략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런 전략을 선택한 그들의 관점과 태도 때문이다.
‘심동모이’에 대한 이해가 없는 ‘모동심이’를 택한 기업은 아무리 성공해 봐야(이것도 쉽지 않지만) 시쳇말로, ‘A급 짝퉁’을 정점으로 이내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유니타스브랜드 Vol.1 p22 참조).

 

*‘모동심이’의 모방이 있고, ‘심동모이’의 모방이 있죠
유지기가 《사통》에서 옛것을 배우는 방법으로 제시한 방법이 모동심이와 심동모이다. 그는 책에서 “대개 겉모습은 달라도 마음이 같은 것은 모방 중에서 윗길 가는 것이고, 겉모습은 같지만 마음이 다른 것은 모방 중에서 아랫길이 된다”고 하며 모동심이와 심동모이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UB오래된 미래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다’라는 표현처럼 과거는 답을 갖고 있다.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많은 암시를 내포하며 미래에 대한 단서를 이곳 저곳에 숨겨둔다. 한 개인의 역사에서, 또 인류의 역사에서 이러한 패턴 읽기는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 패턴 읽기가 바로 트렌드(한 시대의 시대정신이자 과거의 결핍 요인들이 소멸 및 탄생되는 흐름)를 읽는 기술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 유니타스브랜드는 4T를 제안한 바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Trace 현재를 이해하여Trend, 시장을 초월하게 될Trans 미래를 예측하는 것. 그리고 이런 방법으로 읽어낸 그 패턴을 적절한 시기Timing에 세상에 드러내는 것, 이것이 브랜더와 마케터를 위한 트렌드 읽기 훈련이 되어야 할 것이다(유니타스브랜드 Vol.18 p18 참조).

 

 

고전, 브랜드의 지혜가 되다
 Q
연암과 다산은 대표적인 조선의 실학자이지만, 조금은 다른 학문의 전선에 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필요한 학자는 연암일까요, 다산일까요? 더군다나, 브랜더라면 어떤 지식인의 모습을 심동모이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A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서문에서 저는 다산과 연암에 대해 이렇게 적었습니다. ‘연암은 높고 크고, 다산은 넓고 깊다. 연암은 읽는 이의 가슴을 쿵쾅대게 하고, 다산은 답답한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연암과 다산의 차이를 잘 나타내 주는 문장이죠. 다산은 방법론(methodology)을 가르치지만, 연암은 사유의 근본을 가르쳐 줍니다. 어떤 면에서는 연암이 훨씬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생각할 거리를 툭 던져 주며 네 맘대로 알아서 해, 하고는 숙제만 주고 나가 버리는, 그리고는 답을 찾든 안 찾든 상관도 않는 아주 무서운 선생님이죠.
 
그에 비해 다산은 친절한 선생님입니다.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풀어서 설명해 줄 뿐더러, 그 답까지 만들어서는 먹여 주지요. 또 연암은 수직 지식이라 할 수 있고, 다산은 수평 지식이라 할 수 있죠. 왜냐면 연암은 문제를 던져주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드는 파괴자이고, 다산은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이 ‘코어밸류’ 있는지 알려 주고는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매뉴얼로 만들어 주는 해설자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연암은 창조자(cre-editor)이며, 다산은 편집자(editor)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더 필요할까요? 둘 다 필요하지요. 더군다나 브랜더라면 말입니다. 시야의 확장과 방법론의 무기를 완벽하게 장착하려면 다산이 필요하고, 그 시각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질문의 깊이를 가지려면 연암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둘의 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Q
연암이든 다산이든, 결국 우리가 고전에서 배워야 할 것은 ‘원리’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이 원리를 브랜드에 다시 적용해 본다면, 사실 브랜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차별화’입니다. 원리는 가져오되, 그것을 어떻게 차별화시켜 자신만의 독특함으로 보여 줄 것인가가 새로운 화두가 될 것 같은데요.

 

A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주역(周易)》에 나오는 말인데요, 그 뜻은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나니, 통하게 되면 오래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UB통변(通變)’이라고 줄여서 상용어처럼 쓰이고 있지요. 이 말의 뜻은 단순하게 말해 ‘변해야 통한다’는 말입니다. 사물이든 무엇이든 간에 오래되면 그 시대와 단절이 되는 지점, 그러니까 소통되지 않는 지점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궁해지는 지점을 만난다는 말입니다.
 
브랜드로 치자면 시장에서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멈춰 버리는 지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멈추게 된 이유는 딱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모습으로는 그 상황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무언가 코드를 바꿔 줘야 하는 시점이 왔는데 그냥 지나갈 경우, 결국 하향 곡선을 그리고 맙니다. 그러면 시장에서 사라지고 말겠죠. 그러나 바뀌어야 할 지점이 왔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바꾸면, 다시 소통이 시작되어 상향곡선을 그릴 수 있습니다. 통변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꿔야 할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이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혼동을 하죠. 그래서 결국, 차별화를 하지 못하고 비슷비슷해지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상동구이(尙同求異)’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에서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혜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상동구이란 ‘상동(尙同), 같음을 숭상하되, 구이(求異), 다름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같게하고, 무엇을 다르게 해야 할까요? 바로 ‘원리는 같게 하되, 방법은 다르게 한다’는 겁 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생각해 보면 다시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다르게 한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결과를 얻어 내기 위해서는 같은 모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전략을 취했을 때 같은 결과를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이죠.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한 십여 년 전에 안동찜닭이 유행했잖아요? 그때 안동에 안동 주방 아줌마들이 동이 날 정도라는 우스갯 소리까지 할 정도로 엄청나게 시장에서 호황을 누렸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몇 개를 제외하고는 자취를 감추고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안동찜닭이 유행을 할 때,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원리’입니다. 아마도 안동찜닭이 유행할 수 있었던 원리는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겠죠. 첫째, 닭고기가 쇠고기나 돼지고기보다 값이 싸다. 둘째, 매콤해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셋째, 찜이니까 기름기가 빠져서 콜레스테롤이 낮다. 넷째, 오리고기를 잘 못 먹는 사람도 닭고기는 여성들을 비롯하여 남녀노소가 다 잘 먹는다. 이렇게 원리를 살펴본 후에, 그 중 몇 가지 원리를 적용시켜 안동찜닭이 아닌 다른 브랜드를 만들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동찜닭이 유행이니까 원리가 아닌 안동찜닭이라는 방법만을 열심히 쫓았습니다.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혼동하는 순간, 그것은 통변하지도 못하는 겁니다.

 

 

通變
궁하면 변해야 하고, 변하면 통하나니, 통하게 되면 오래 갈 수 있다.

 

 

Q
브랜드는 결국, ‘something different’와 ‘something new’를 통해 ‘something special’을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결국, 이 과정 또한 원리가 아닌 ‘방법’적인 측면에서 고민해 봐야 할 문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원리’라는 것을 고전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일 텐데요. 저는 그 답을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새롭고도 예롭게’라는 글에서 찾았습니다. 이 말은 마치,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것과 데칼코마니를 한 것처럼 보이더군요.

 

A
연암의 이야기를 모두 브랜드 관점에서 해석하시니 공부를 하는 학자로서 무척이나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새롭고도 예롭게, 그러니까 ‘가장 새로워지려면 가장 예로워져라’는 말입니다. 연암은 《초정집서(楚亭集序)》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법고이지변(法古而知變), 창신이능전(創新而能典). 줄여서 ‘법고창신’이라고들 말하지요. 이 말의 뜻은 법고이지변, 옛것을 본받더라도 변화를 알아야 하며, 창신이능전, 새로운 것을 창작하더라도 고전에 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사실, 연암이 문장론을 논하며 한 얘기지만, 모든 것에도 적용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연암은 “옛것을 본받으라고 하면 겉껍데기만을 흉내 내니 문제가 되고, 새것을 만들라고 하면 듣도 보도 못한 가당치도 않은 황당한 말만 하고 있으니 문제다”라고 말하지요. 그러면서 결국 옛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반드시 변해야만 가치가 있으며, UB새로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의 법도는 언제나 예로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로움과 새로움은 언뜻 보면 공존할 수 없기에, 이 말은 모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변할 수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변치 않는 가치가 될 수 있으며, 새로움은 언제나 예로움의 바탕 위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말이 모순이 아닌 ‘완전한’ 말임을 아는 사람만이 진짜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겠지요. 새로울 때만이 예로울 수 있으며, 새것과 옛것은 결코 별개가 아닙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지요. 현상은 계속해서 지나갑니다. 브랜드는 그 현상 속에서 새로움과 예로움을 찾아내야 합니다.

 

Q
인터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인생 특강을 들은 것 같습니다. 결국, 고전에서 저희가 배우는 것은 지나간 옛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지혜임을 다시 한 번 깨닫습니다. 연암과 다산이 현재 우리와 함께 산다 해도 결코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우러져 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전은 여전히 낯설어 보입니다. 고전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A
옛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 중에 ‘독만권서, 행만리로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간다’는 뜻인데, 독서와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자주 경험합니다. 외국에 학회가 한 번 있을 때마다 나갔다 들어오면 새로운 논문이 하나씩 탄생합니다. 학회에서는 한 회에 보통 700~800편의 논문이 등장해요. 이 논문들을 읽고, 또 강의를 듣다 보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하나씩 떠오르죠. 결론적으로 ‘미친 듯이 공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쳐 보지 않고서는 어떤 경지에도 도달할 수가 없지요. 미친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맨날 흉내만 내다 끝나 버립니다.
 
저도 다산을 연구하고 연암을 연구할 때, 말 그대로 물불 가리지 않고 파고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다산이 제 안에 들어오고, 연암식으로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것을 다산 식으로 얘기하면 ‘문심혜두(文心慧竇)’입니다. ‘문심(文心)’은 글, 혹은 사물을 이해하는 마음이고, ‘혜두(慧竇)’는 지혜의 구멍이라는 뜻인데, 사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의 구멍이 뚫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든 이 지혜의 구멍이 뚫리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 지혜의 구멍이 뚫리려면 결국 ‘열심히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저는 브랜드 전문가가 아닙니다. 그러나 브랜드를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문심혜두의 결과입니다. 고전에는 오늘날을 사는 지혜가 들어 있지요. 고전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독만권서, 행만리로를 통해 지혜의 구멍이 열릴 때까지 하라는 것, 이것 외에 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역》
유교 경전 중 삼경의 하나로서 《역경》 또는 《역》이라고도 한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 동시에 가장 난해한 글로 일컬어지며, 오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경전이다. 주역이란 글자 그대로 주나라의 역이란 뜻으로, 역이란 말은 번역, 즉 ‘바뀐다’ ‘변한다’는 뜻으로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하고 풀이한 것이다. 《주역》은 점복을 위한 원전과도 같은 것으로, 동시에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흉운을 물리치고 길운을 잡느냐 하는 처세상의 지혜이며 나아가서는 우주론적 철학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점서를 위해 만들어진 역이 시대를 거치면서 학자들에 의해 고도의 철학적 사색과 심오한 사상적 의미가 부여되어 인간학의 대경대법으로 정착된다. 《주역》은 유교의 경전 중에서도 특히 우주 철학을 논하고 있어 한국을 비롯한 일본, 베트남 등의 유가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점복술의 원전으로 그 의미가 크다.

 

UB통변
‘변해야 통한다’는 말은 혁신과 새로움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기업에게도 너무나 와 닿는 말일 것이다. 이를 위해 기업은 재활성화 전략(revitalization)이란 이름 아래 리뉴얼(renewal), 리포지셔닝(repositioning), 리인포스(reinforce) 등을 위한 묘안을 강구해 멈춰버렸거나 고꾸라진 성장곡선을 다시금 치켜세운다. 특히 유럽권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브랜드학의 구루, 장 노엘 캐퍼러 교수는 재활성화 전략을 위해 ①원형(prototype)을 지속적으로 현대화할 것, ②또한 그 원형을 재창조할 것, ③미래를 지배할 소비자의 트렌드와 행동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것을 제안하고 있다.

 

UB새로움을 추구하지만 그것의 법도는 언제나 예로움에 바탕을 둔다
 연암의 교훈은 강력한 브랜딩 구축을 위한 방법론 중 하나인 ‘원형(RAW, archetype)’에 대한 연구와도 맥을 같이 한다. raw란 ‘날것의’ ‘가공 이전의’란 의미인데, 좀 더 넓게 해석하자면 어떤 사물의 옛 모습, 즉 ‘근원적인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토바이의 원형은 말horse로 해석할 수 있다. 혹시 이런 RAW 상태의 것이 지닌 속성을 잘 응용한 오토바이 브랜드가 떠올려지는가? 말 달릴 때 나는 소리와 진동을 할리데이비슨이란 브랜드는 새롭게 재해석해 구현해내고 있다. 우리는 이런 브랜드를 RAWlish한 브랜드라 명명한다. RAW(예로움)를 RAWlish(새로움)로 구현해 내는 것은 원형(RAW)에 담긴 스토리를 브랜드의 스토리텔링으로 활용할 수 있기에, 또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할 수 있기에 강력한 브랜딩을 위한 요긴한 방법이 되곤 한다(유니타스브랜드 Vol.14 p25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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